제목: 종이 동물원
저자: 켄 리우
옮긴이: 장성주
발행처: 황금가지
발행일: 2018년 11월 29일
<종이 동물원>은 켄 리우 작가의 SF 판타지 소설집이다. 휴고 상,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받은 단편 소설 <종이 동물원>을 비롯한 14편의 소설들이 수록되었다. 켄 리우 작가의 작품은 이번 책으로 처음 접해봤는데, 나는 판타지도 SF도 좋아하는 편이라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서사 구조나 글의 형식 등의 측면에서도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고, 단편집이라 하루에 한 편, 두 편 정도로 조금씩 나눠 보기에도 좋다. 소설 내용 면에서 SF적인 요소와 환상 요소들이 적절히 융화되어 있는 느낌이라 두 장르 중 어느 한쪽이라도 취향에 맞는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소설의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이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좋았다. SF 디스토피아 세계관이든 근현대사의 한 지점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이든, 이 소설들에서 그리는 세상은 대개 무정하고 무심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에, 서늘함 속에서도 전해지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정이 있다. '서늘하게 빛을 내는 사이보그의 강철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따뜻한 느낌' 같은 소설들이다. 이 소설집에서 흥미롭게 읽었던 소설 세 편을 소개해보려 한다.
먼저 소설집의 표제작 이기도 한 <종이 동물원>이다. 주인공 잭은 중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잭의 어머니는 자신의 작은 고향 마을에서 전해지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종이 접기로 만든 동물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신비한 능력이다. 잭은 어머니가 접어준 종이호랑이를 비롯한 많은 종이 동물들과 놀면서 자라지만, 친구를 사귀고 사회적 교류가 늘어가면서 남들과 다른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게 되어 점차 어머니와 관련된 것들을 전부 거부하고 멀리한다. 성인이 된 잭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가 접어주었던 종이 동물들을 다시 꺼냈다가 종이 동물들 안에 어머니가 중국어로 적어둔 편지를 발견하고, 뒤늦게 어머니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미국 사회에서 유색인종 혼혈 가족이 겪는 존재론적 불화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걸 주류 언어(=영어)와 주류가 아닌 언어(=중국어)의 대비와 연결 지었다. 주류 질서 바깥의 것, 남들과는 다른 것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바깥 존재'들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것이 어머니의 중국어인 것이다. 어머니는 종이 동물들을 접고 숨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하는 신비한 능력, 곧 현실 너머의 무엇을 가진 사람이면서 동시에 중국어라는 (미국 사회의) 비주류언어 사용자이자 미국 사회의 소수자이다. '영어로 말하는 사랑은 입술에서 느끼는 걸로 그치지만, 중국어로 아이라고 말할 때 비로소 가슴으로 그 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서 어머니는 그녀가 영어를 쓰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강요하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오역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숨결과 진심을 담아 살아 움직이게 한, 즉 자기 자신을 담은 종이 동물들에 중국어로 적은 편지를 남김으로써 포기하지 않고 중국어로밖에 말할 수 없는 진심을 아들인 주인공에게 전하려 한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 이야기가 주인공에게 전달되는 결말을 맞으면서, 작품은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 <종이 동물원>은 이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들 중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SF적 색채가 가장 적은 작품이다. 환상성이 강하면서도 현실적인 배경을 놓치지 않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소개할 작품은 <즐거운 사냥을 하길>이다. 량은 요괴 사냥꾼인 아버지를 따라 후리징이라는 여우 요괴를 쫓다가 후리징의 딸이자 역시 여우 요괴인 염을 만나고, 염의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로부터 염의 존재를 숨겨준 뒤 몰래 친구로서의 인연을 이어간다. 그러나 중국에 외국의 자본과 기술이 빠르게 들어오면서 요술은 사라지고, 요괴도 요괴 사냥꾼도 생존이 어려워진다. 량은 홍콩으로 떠나 뛰어난 기계 기술자가 되지만 중국인이기에 식민지를 지배하고 있는 영국인들에게 모멸적인 대우를 받으며 이용당하면서 살아가고, 그런 그를 매춘부 일을 하다 고위층 손님에 의해 강제로 몸이 기계로 바뀐 상태로 도망쳐 나온 염이 다시 찾아온다. 염은 요술을 부리던 때처럼 여우로 변신해 사냥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그런 염을 위해 량은 자신의 기술을 동원해 염이 기계 여우로 변할 수 있도록 개조해 준다.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홍콩이라는 현실적인 근현대사적 배경에서 시작해서, 점차 가상의 스팀펑크 세계관으로 변하는 배경 설정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소설은 마지막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다. 기술의 시대는 염의 존재성을 두 번 앗아갔다고 할 수 있다. 요술이 사라지면서 본래의 모습인 여우로 둔갑할 수 없게 되어 자유를 잃고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된 것이 첫 번째라면, 강제적으로 사이보그화 되는 경험, 즉 완전히 기계화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온전히 육체적 존재로 남아있지도 못한 상태가 된 것이 두 번째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훼손당하는 경험이다. 여기서 염이 내리는 선택이 인상적이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자는 량의 제안을 거절하고 완전한 스팀펑크적 기계로 탈바꿈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육체성을 새롭게 정의하고 이를 통해 여우로 변하는 능력과 자유를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마침내 크롬 여우로 변한 염과 이를 만들고 지켜보는 량에게 있어 "오래된 요술"은 "금속과 불의 요술"로 변해서 되돌아오고, "불과 연기의 냄새", "윤활유와 연마한 금속의 냄새"는 "자기 본래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없는 "증기와 전기의 새 시대"의 상징에서 "되살아난 고대의 환상"이 지닌 "권능의 향기"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요술이 된 기술은 염의 "차가운 금속 몸"을 "따뜻한 느낌,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몸으로 만든다. 기술이 요술을 대체하고 요술이 사라진 땅에서, 요술에 그 존재의 바탕을 두었고 그래서 기계의 시대 속에 소외되고 존재가 희미해져 버린 이들이, 기술을 자신들의 요술로 전유하는 장면이 오묘한 신비감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크롬 여우가 된 염이 달려 나가고, 그런 염을 바라보며 '즐거운 사냥'을 기원하는 량의 마지막 장면이 처절한 환희로 빛난다.
마지막으로 <파(波)>는 세계 곳곳의 인간 창조 설화들과 우주를 여행하며 지구를 대신해 새로운 인간의 터전이 될 행성을 찾는 기나긴 여정을 수행 중인 시폼(sea foam)호의 인간들이 여러 기술적 특이점을 지나면서 새로운 존재로 변화해 가는 과정이 교차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여러 차례 존재성의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인간 정신에 대해 상상해 보는 작가의 시도가 놀랍다. 또한 제목과 우주선의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앞선 파도를 따라잡고 또 앞지르며"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가지는 순환의 이미지는, 작품 내에서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우리는 여러분의 뒤를 쫓아오다가, 여러분을 앞질렀어요./어서 오세요, 옛사람들이여."라는 말로 대변되는 인간 종의 변화 과정을 은유한다.
이는 동시에 소설의 수미상관 구조(가장 첫 장면의 중국 창조 설화인 여와 여신 이야기와 맨 마지막 장면의 유사성)가 주는 순환과 반복의 감각과 공명하면서 작품이 담고 있는 의식을 드러낸다. 지적 생명체의 탄생과 소멸이 자연스럽게 순환하는 거대하고 무심한 우주의 질서, 그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인간 종의 진화, 그 끊임없는 격랑 속에 놓인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의 가능성에 대한 사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작품들이 많았다. SF적 배경을 바탕으로 미스터리 장르의 이야기 문법을 따르고 있어 읽는 재미가 있는 <레귤러>, 작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국의 고전 문화에 바탕을 둔 <파자점술사>, <송사와 원숭이 왕> 등의 작품이 있다. 또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이나 <상급 독자를 위한 비교 인지 그림책>과 같은 작품에서는 쓰는 행위와 소통에 대한 저자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사실 이 작품집을 아우를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는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책의 머리말에서 "모든 의사소통 행위는 번역이라는 기적"(8)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남에게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려 애쓰며 평생을 보낸다. 그것은 기억의 본질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 무감하고 우연적인 우주를 견디며 살아간다."(7) "내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9)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서늘함 속 따뜻함은 저자의 이런 생각에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맛있는 텍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벤 올린, <<이상한 수학책>>, 북라이프, 2020. (0) | 2023.06.20 |
---|---|
J.R.R. 톨킨, <<호빗>>, 씨앗을 뿌리는 사람, 2007(개정판). (0) | 2023.06.15 |
양승욱,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세계사>, 탐나는책, 2021. (0) | 2023.05.23 |
김중혁, <무엇이든 쓰게 된다>, 위즈덤하우스, 2017. (0) | 2023.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