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원제: Murder on the Orient Express
저자: 애거서 크리스티
옮긴이: 신영희
발행처: 황금가지
발행일: 2014년 11월 25일 (1쇄 2013년 12월 31일)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한다고 감히 말하기가 부끄럽게도, 나는 추리소설의 고전이나 다름없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게 이번이 처음이다. (사실 아주 어릴 적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읽어봤던 것 같은데, 제대로 이해를 못 했었는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차마 읽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그래도 셜록 홈즈는 나름 열심히 읽었다는 걸로 위안 삼아 본다. 이번에 읽어보니 역시 왜 추리소설의 고전이라고 하는지 대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사실 요즘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서 머리를 식힐 겸 가볍게 읽기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순식간에 몰입해서 숨 쉴 틈도 없이 다 읽어버렸다.
(무려 1934년에 출간된 아주 유명한 작품이고, 영상화도 여러 번 이루어진 작품이므로 줄거리를 알 사람은 이미 다 알 것 같지만, 그래도 나 같은 늦깎이 독자가 있을 수 있으니 이후로 이어지는 글에서는 스포일러 주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폭설로 멈춰 선 오리엔트 특급 열차라는 일종의 밀실 안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유명 탐정인 에르퀼 푸아로가 해결하는 이야기이다. 살해당한 남자 라쳇의 시신과 방을 조사하던 푸아로는 피해자가 몇 년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암스트롱 가의 어린 딸을 납치해 살해한 범인임을 알게 된다.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 이제 푸아로가 활용할 수 있는 건 열 명 남짓한 승객들의 증언들뿐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소설의 구성에 있어서 추리소설의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미스터리 한 사건이 발생하고, 탐정의 조사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독자에게도 추리의 기회를 주고, 마침내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탐정이 소설 속 인물들과 독자들에게 사건의 총체적 전말을 설명하는 식의 구성이다. 이런 구성은 독자들이 추리게임에 참여하도록, 탐정의 입에서 전말을 듣기 전에 범인 혹은 사건의 내막을 스스로 맞춰보도록 독려한다. 어찌 보면 추리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탐정과의(혹은 탐정을 페르소나로 앞세운 저자와의) 대결이며, 그런 만큼 독자가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진 이야기가 되려면 흥미로운 사건은 물론 매력적인 탐정 캐릭터가 필수라고 할 수 있다.
에르퀼 푸아로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탐정 캐릭터이다. 푸아로는 사건과 관계된 사람들의 진술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서 모순점이나 의문점들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사건의 진실을 탐색한다. “보시다시피 난 전문적인 수단에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잘하는 것은 사람의 심리분석이지 지문이나 담뱃재 채취가 아니죠.”(74)라는 푸아로 본인의 말대로, 푸아로의 추리 방식은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중점을 두는 방식이다. 말 그대로 ‘안락의자에 앉아 진실을 밝히는 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증거 중심의 추리를 하는 셜록 홈즈와는 다른 스타일이다. 물론 홈즈도 대면 수사를 하고, 때로는 연기나 변장으로 사람들을 속이거나 교묘한 말로 범인이나 기타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방식을 사용해서 수사하기도 한다. 반대로 푸아로 역시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단서를 찾기도 하는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는 피해자가 태우다 만 편지의 내용을 일부 복원해 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어쨌든 두 탐정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인지 이미지도 상당히 달랐는데, 홈즈가 사건을 해결할 때의 역동적인 모습과 사건이 없을 때의 권태로운 모습 사이의 격차가 큰 반면, 푸아로는 항상 신체적으로 정적이고 안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서 흥미로웠다. 그렇다 보니 사건은 긴박하더라도 푸아로는 쫓기는 것 같은 느낌이 없었다. 특히 푸아로 옆에 마음이 급하다고 해야 할까, 빨리 결론을 내고 싶은 것처럼 구는 캐릭터가 한 명 있어서 푸아로의 신중함과 정적인 모습이 더 대비되어 다가왔다. 이런 이미지가 에르퀼 푸아로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드러내면서 푸아로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흥미롭게 여겨졌던 부분이 있다면 푸아로가 수사 과정에서 현대 프로파일링 기법에 가까운 모습을 보일 때였다. (내가 아는 프로파일링에 대한 지식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본 얕은 지식뿐이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으로 증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기억해야 하는 상황의 날씨와 주변 환경, 했을 법한 행동을 차례차례 일러주며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해서 기억을 불러내는 장면이 있었는데, 목격자의 진술을 돕는 일종의 법최면 기술이라고 알고 있다.
(“(...) 자, 기억을 되살려 보십시오.” / 푸아로가 용기를 북돋워 주듯 말했다. / “밖은 아주 추웠습니다. 두 분은 기차로 돌아왔어요.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웠습니다. 시가일 수도 있고, 파이프 담배였을 수도 있고...”(238)) 또 주변 인물들과 범인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범인으로 제시된 인물의 성격 유형과 발생한 범죄의 행동 방식이 맞지 않는다는 식의 심리학적 분석도 등장했다.(“명예를 알고 약간 바보스럽지만 고결한 영국인이 원수를 열두 번이나 칼로 찔러 댄다! 그런 일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습니다!”(246)) 또 열차 승객들과 한 명씩 대면 조사를 할 때에는 각 인물의 성격적 특성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화를 이끌고 질문을 던지면서 상대의 반응을 살피고, 이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모아가는 모습은 프로파일러라는 단어를 저절로 떠올리게 했다. (이 생각이 어디서 나왔나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일 살인사건>이라는 영화에 나타난 푸아로의 프로파일러적인 수사 기법에 대한 이야기를 1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영상콘텐츠에서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났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폭설로 정차해 버린 오리엔트 특급 열차라는 독특한 공간 배경을 설정하고 있는데, 이런 배경을 내용 면에서든 작품의 분위기 면에서든 잘 활용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일러 주의!) 특히 사건이 일어난 한 열차 칸에 타고 있는 모두가 공범이라는 사건 설정이 드러나면서 일종의 폐쇄의 감각을 느꼈는데, 이 눈에 둘러싸인 열차 칸이라는 폐쇄적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미 스포일러를 한 마당에 결말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 보자면, 열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되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 살해된 피해자는 흉악 범죄자였고, 열차에 탄 모든 사람들은 그가 벌인 범죄의 피해자 가족인 암스트롱 일가와 가까운 사람들로서 법정 판결에 따라 내려진 처벌조차 받지 않고 미국에서 도망친 라쳇에게 복수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푸아로는 라쳇을 죽인 이들이 연출하고자 했던 사건의 전말과 이들의 실제 행위를 모두 제시하고, 이 자리에서 이들의 사연과 동기까지도 모두 밝혀진다. 푸아로는 추리를 들려주기 전부터 “이 사건에는 두 가지 해결책이 있습니다. 두 가지 해결책을 여러분 앞에 제시하고, 그중 어느 것이 옳은지 여기 있는 부크 씨와 콘스탄틴 의사 선생에게 물어볼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범인이 아닌 두 사람에게 판단을 넘긴다. “첫 번째 추리를 너무 성급하게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나중에라도 그것에 동의하게 될지 모르니까요.”라는 말을 보면 푸아로는 이들이 첫 번째 추리, 즉 범인들이 연출하고자 했던 사건 내용을 진실로 만드는 데 동의할 것임을 예상한 것 같다. 범인들이 공모해 연출하고, 연루된 이들이 동의하고, 사건을 파헤친 탐정이 암묵적으로 공조하면서(“그렇다면(...) 여러분 앞에 해결책을 내놓았으므로 전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연출된 내용은 진실이 된다. (이들은 곧 도착할 유고슬라비아 경찰에게 첫 번째 추리의 내용을 내놓음으로써 진실로 공표할 예정이다.)
진짜 있었던 일이지만 관계된 이들이 함구함으로써 묻히게 될 진실과, 인위적으로 연출되고 구성된 이야기지만 관계된 이들이 진실이라고 공표함으로써 진실이 될 꾸며낸 이야기 사이의 위치 역전. 관계된 여러 사람들의 동의를 통해 ‘구성된 진실’, 사실과는 어긋나 있는 진실이라는 아이러니가 매력적이다.
이와 관련해, 푸아로는 사건의 진짜 전말을 설명하는 두 번째 추리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연극’에의 비유를 사용한다. 객차 내의 모든 인물들을 사건이라는 연극에서 하나씩 역할을 맡도록 배치해 보았다는 식으로 전말을 설명하는 것이다.
연극이라는 비유는 일차적으로는 등장인물이자 범인(혹은 공모자) 중 한 명이 유명 연극배우라는 점에서 내용상의 연관성을 가진다. 더 나아가서 첫 번째 추리와 두 번째 추리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비유이기도 하다. 첫 번째 추리의 사건 전말은 범인들이 준비한 일종의 연극이다. 하지만 ‘이것이 연극이다’라는 선언은 두 번째 추리인 진짜 사건의 전말이라는 맥락에서야 가능해진다.
즉 연극의 바깥에서만 이것이 사전에 철저히 준비된 이야기이자 연극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으며, 연극 안에서 ‘지금 이것은 연극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용납되지 않는다. 연극은 연극-아님, 연극의 바깥에서야 연극이 될 수 있다. 열차 내의 모든 승객이 두 번째 추리를 들었고 그것이 진짜 사건의 실체에 가깝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비로소 첫 번째 추리를 공식적인 진실로 선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두 개의 추리는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써 놓고 보니 내내 혼자 갑자기 신 나 하는 것 같아서 좀 쑥스럽다. 그만큼 소설이 재미있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추리력은 별로여도 추리 소설은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로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이 왜 추리 소설의 고전을 꼽을 때 꼭 들어가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직 읽어보지 못한 다른 작품들과, 특히 어릴 적 채 이해하지 못했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
- 나일 살인사건 Death On The Nile 은 1978년에 제작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존 길러민 감독의 영화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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