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 (역사가가 찾은 16가지 단서)
저자: 설혜심
발행처: (주)휴머니스트출판그룹
발행일: 2021년 8월 16일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는 영국사를 전공한 저자가 영국사 지식을 바탕으로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 작업을 담은 책이다.
탐정, 집, 독약, 병역면제, 섹슈얼리티, 호텔, 교육, 신분 도용, 배급제, 탈것, 영국성, 돈, 계급, 미신, 미시사, 제국이라는 16가지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전간기(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 시기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비롯한 다양한 작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다양한 소설을 집필한 추리소설의 황금기이기도 하다) 영국 사회에 대한 배경 지식을 제시해 주고 이것이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보여주기도 하는 친절한 책이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고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다. 이런 해설서들은 당연히 다루고 있는 소설들을 많이 알수록 더 재미있게 읽게 되고 반대로 해당 작품들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았다면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조금이라도 되는 대로 많이 읽어보고 읽어야 할 책인 것 같기도 하다. 흥미롭게 읽었지만, 아직 읽어본 소설이 많지 않아서 스스로 아쉬운 독서 경험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전간기 영국사와 영국 문화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소설을 잘 몰라도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을 읽기로 한 건, <<살인을 예고합니다>>를 읽고 나서 결정한 것이다. <<살인을 예고합니다>>에 대한 글을 쓸 때는 특별히 따로 다루지 않았지만, 소설에서 ‘마을에서 공공연하게 하고 있는 불법 물물교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물물교환이 왜 불법이라는 건지 이해를 못 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도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싶었다. 왠지 당시 사회상에 관련된 것 같은데 어떻게 찾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를 발견해서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불법 물물교환의 진실은 이 책의 ‘9. 배급제’ 챕터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당시 영국 사회에서는 전쟁의 영향으로 연료와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식량의 60퍼센트 정도를 해외 수입에 의존했는데, 전쟁으로 인해 이것이 힘들어지면서 사재기, 폭리를 단속하고 배급제를 실시했다. 배급제의 실시는 영국 국민이자, 첩자가 아니며, 식량 배급 대상자임을 증명한다는 의미로 신분증 발급과도 이어졌다. 1917년에 이은 1940년의 두 번째 배급제에서는 소고기, 버터, 베이컨, 홍차, 마가린, 잼, 설탕 시럽과 사탕, 과일에서 의류로까지 확대되어 갔다고 한다. 치핑 클레그혼 마을에서 일어나는 공공연한 불법 물물교환은 사실 암거래였던 것이다. 버터, 고기, 의류 쿠폰 등을 가까운 마을 사람들끼리 은밀히 교환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먼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이 가진 복잡성과 양면성을 주지시킨다. “애거서가 가진 묘한 복잡성과 콤플렉스도 눈에 띄었다. 여성해방주의자인 듯하면서 묘하게 여성혐오적이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면서도 돈을 좋아하고, 코즈모폴리턴을 표방하면서도 지독한 영국우월주의자인 모습 등등이 말이다.
실제로 애거서의 작품에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분명히 차별이나 편견이라고 부를 만한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의 특징이면서 동시에 대중 소설 전반의 특징이기도 할 것이다. 대중들의 욕망과 당대의 사회 담론, 기존 질서에 순응하고 편입되고 싶은 욕망과 기존 질서를 전복하고 싶은 욕망, 이들 사이를 넘나들며 많은 것들을 충족시켜 주는 만큼 복합적이고 양면적인 양상을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대중 소설에 대한 비평적이고 학문적인 접근은 이렇게 다면적 양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욕망의 반영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대중 소설이 ‘비평의 대상’으로, 혹은 ‘가치 있는’ 텍스트로 여겨지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대중 소설의 이러한 복잡한 위상은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책을 “애거서 크리스티에게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작은 노력”이라고 말한다.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과 같은 추리 소설은 대중소설인 만큼 당대 독자들이 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 실제 당시의 영국인들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으므로 사회학적 텍스트로서 유의미할 수 있다. 저자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작품의 현실성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특정 시기의 한 사건을 이야기로 구성하려면 당시의 굵직한 사회적 변화를 투영하는 동시에 일상의 온갖 이상야릇한 사건들을 포함해야 한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고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추리소설은 사회사에서 아주 유용하고도 풍부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지어, 책의 ‘15. 미시사’ 챕터의 내용도 흥미로웠다. 어찌 보면 소설 집필 당시의 영국사와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챕터들과는 좀 이질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을 읽는 관점으로서는 재미있는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웅덩이 속의 물 한 방울만큼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도 없단다.”라는 마플의 말을 미시사에 대한 설명으로 인용한다.
미시사 개념이 제시되기 전 근대의 역사 서술은 정치, 경제, 국가 등을 중심으로 한 거시사라고 할 수 있고, 이는 서양과 근대와 같은 기존 권력의 관점을 바탕으로 서술되기 쉽다. 미시사는 이러한 측면을 주목하고 역사 서술에 있어 기존 권력이 배제한 주변적 요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둔다. “즉 지배층이 아닌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고 “거시사가 상정하는 집단적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개인의 삶을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다.
미시사의 관점에서 “대공황, 전쟁, 인권운동, 과학적 발견 등 보통 역사에서 다루는 굵직한 사건들이 개인에게는 무의미하거나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시사는 이야기체 서술을 지향한다. 거시사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다루는 일도 미시사의 관점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관련된 이들마다 각자 다른 해석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야기체 서술은 이러한 다성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식이 된다. “이야기들은 때때로 이질적이고 상충하며, 이야기가 섞이면서 심지어 진화하기도 한다. 미시사가들은 이런 복잡한 이야기들을 단순화하지 않고 가능한 한 그대로 적으려 한다. 그러려면 이야기체로 쓰는 방법이 최선이다.” 이는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미시사는 한 개인을 여러 정체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고 정체성의 변화를 겪을 수 있는 존재로 보고 이를 “‘유동적 정체성’ 혹은 ‘관계를 열어두는 행위’”라는 표현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애거서의 작품에는 전혀 뜻밖의 사람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특성 때문에 한 사람에게 내재한 여러 개의 정체성을 관찰하는 데 매우 유용한 텍스트”라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과 미시사를 관련짓는다. 비평적 대상 혹은 사회사적 자료로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들이 지니는 가치 일부분을 이렇게 보여준다.
이 외에도 흥미로운 키워드와 내용들이 많았다. 애거서 크리스티 역시 복잡하고 다층적인 한 개인으로서 여러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11. 영국성’ 챕터가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서는 다양한 차별과 편견들도 발견되는데, 그중에는 동양과 같은 비유럽 지역에 대한 차별, 유럽 내 다른 나라에 대한 편견도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 보자면 <<오리엔탈 특급살인>>에서 언급되는 이탈리아인의 성미에 대한 이야기와 불신 같은 것들이 있다. 이것은 ‘영국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당대 영국인들이 가진 일종의 민족적 우월의식과 연결된다. “영국인들의 섬나라 근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럽에 널리 알려졌던 특성이었다. 고립된 섬나라의 특성상 혼자 잘난 줄 알고, 지나치게 거만하고 뽐내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는 ‘영국인 근성’이라는 말도 나오게 된다. 섬나라 근성과 영국인 근성은 사실 상호 호환이 가능한 말이다. 그런데 섬나라 근성이 주로 다른 나라나 민족을 무조건 싫어하고 경멸하는 배타성을 이야기한다면, 영국인 근성은 ‘우리는 이렇다’는 자기 정체성과 관련해 쓰이곤 한다. 이처럼 정체성을 강조할 때는 보통 ‘영국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동전의 양면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다른 나라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르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러면서 자기 정체성이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에 대해 의식하고 ‘섬나라 근성’과 같은 단어를 일부러 사용하면서 이를 비꼬기도 했다는 것이다.
‘16. 제국’ 챕터의 내용도 이와 유사한 결이다. 저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여러 작품들에서 당대 영국이 식민지에 대해 가지는 의식, 식민지를 주체성 없는 ‘주변부’로 대하는 인식이 반영된 부분들을 살펴본다. 그러면서 동시에 애거서 크리스티가 두 번째 남편을 따라 고고학 발굴 활동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이익에 눈먼 전형적인 식민주의자들과 자신을 분명하게 구분”지음으로써 “제국주의적인 죄의식에서 도피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을 가능성을 읽어낸다.
또 전간기에 여성 작가들의 추리 소설이 유행한 이유에 대한 해석도 흥미로웠다.(‘1. 탐정’ 챕터에서 다뤄지는 내용이다.) 그 사회적 배경에는 전쟁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셜록 홈즈처럼 이성과 논리 등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특징들을 주력으로 내세우는 완벽한 영웅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성을 내세우는 ‘코지 미스터리’ 물이 인기를 끌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의 추리물은 전쟁 후 피폐해진 일상에서 벗어나는 듯한 환상을 주었다. (...) 거의 모든 범죄가 탐정의 뛰어난 추리로 깔끔하게 종결됨으로써 독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특히 소프트보일드 추리물은 선인과 악인을 선명하게 구별하는 경향이 있는데, 악인을 찾아 처벌하는 결말은 혼탁한 사회에서 종국적으로 도덕성이 회복된다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대중 소설로서 추리 소설이 당시 사회의 욕망을 반영하고 대신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역시 한국 전쟁 시기인 50년대에 신문 연재소설을 비롯한 대중 소설들이 급격히 수가 늘고 유행했다는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외에도 영국인들의 집에 대한 사랑이라던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독)약에 대한 전문성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으니 관심 있는 키워드만 골라서 읽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인물들과 작품들이 꽤 많다. 그것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영국이라는 나라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에 대해 모르는 것, 설명하지 못하는 것, 미처 떠올리지 못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애거서 크리스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작품들의 제목과 내용, 그걸 바탕으로 만든 영화들의 이미지와, 여기저기서 조금씩 들은 에피소드들처럼 파편적인 정보들이 전부인데 그걸 떠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알고 있다고 쉽게 여겼던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번에 <<애거서 크리스티 읽기>>를 통해 반 발짝 정도 더 깊게 읽어보는 경험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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