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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텍스트

애거서 크리스티, <<살인을 예고합니다>>, 황금가지, 2018.

by 마들렌23 2024. 1. 15.

제목: 살인을 예고합니다

저자: 애거서 크리스티

옮긴이: 이은선

발행처: 황금가지

발행일: 2018년 7월 6일 (리커버 특별판. 페이퍼백)

 

 

애거서 크리스티&#44; &lt;&lt;살인을 예고합니다&gt;&gt;&#44; 황금가지&#44; 2018.
표지

 

 

추리소설 리뷰를 쓸 때는 항상 염려가 많아진다. 스포일러 때문이다. 줄거리를 요약할 때 결말을 쓰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내용을 소개하려면 어느 부분까지 요약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부터, 범인의 정체에 대한 언급은 어디쯤에서 하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나 심지어는 ‘스포일러 주의!’ 문구를 어디부터 넣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을 다 읽은 내가 자연스럽게 쓴 정보가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데, 정작 나는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지 않은가? 또 독해에 있어서 언급이 필요한 정보가 스포일러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고민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은 <양들의 침묵>의 오마주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라고 쓰는 순간 소설에서 일어날 몇 가지 일들, 가령 주인공과 주인공의 수사를 돕던 범인 사이에 묘한 유대감 혹은 우정이 생기게 된다거나 범인이 나중에 탈옥하게 된다거나 하는 이야기의 진행에 관해 예상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될 만한 것들은 안 쓰면 그만이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리뷰에 할 말이 ‘재미있었다’ 나 추상적인 단어들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렇다 보니 스포일러에 대해 미리 경고하고 글을 쓰곤 하지만, 매번 이게 맞나 하는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그래도 계속 추리소설을 읽고 뭔가 써 보려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긴 하는 것 같다. (사설이 길었는데,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이번에도 스포일러 주의!)

<<살인을 예고합니다>>는 치핑 클레그혼이라는 시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구독하고 있는 지역 소식지에 살인 예고 광고가 실리면서 시작된다.

 

이 광고를 본 마을 사람들이 예고된 대로 리틀 패덕스에 모이자, 실제로 집에 괴한이 침입해 총을 맞고 사망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된 크래독 경위는 마플 양의 편지를 받은 헨리 클리서링 경의 추천대로 마플 양을 만나 사건에 관해 조언을 듣기 시작하고, 용의자인 마을 사람들에 대해 조사해 나가면서 이들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하지만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요원하다.

리틀 패덕스의 주인인 레티셔 블랙록은 사실 젊은 시절 비서로 일한 경력과 관련하여 곧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을 예정이었고, 크래독 경위는 이를 범행 동기로 보고 범인이 될 만한 이들을 추적한다. 그 와중에 레티셔를 노리는 듯 보이는 범행은 계속 이어져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고, 지금껏 모아 온 단서들을 바탕으로 마플 양은 의외의 실체에 가까워진다.

이 소설은 두 번째로 읽어 본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이자, 처음으로 마플 양이라는 새로운 탐정을 만난 작품이다. 일단 제인 마플이라는 인물이 미혼 여성 노인 탐정이라고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웠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했을 때 마플 양은 사회적으로 비주류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인물이 자신의 탐정 기질과 능력을 발휘하고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다고 설정된 점이 마플을 새롭고 매력적인 인물로 느끼게 했다.

물론 푸아로처럼 탐정 일을 직업으로 삼아 수입을 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공은 경찰들에게 돌리고 자신은 간단한 조언을 했을 뿐이라며 겸양의 태도를 보이는데, 시대상을 생각해 보면 이런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여성, 노인임에도 배제되지 않고 계속 탐정의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고, 대중소설로서도 독자들에게 지탄받지 않고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경찰들은 마플의 통찰력과 추리력을 신뢰하고 조언을 얻는다. 특히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마플 양의 강점은 사람들이 하는 말의 세밀한 뉘앙스와 습관, 아무도 모르고 넘어간 말실수 등을 섬세하게 알아차리고 그 맥락을 바탕으로 추리하는 능력이다.

특히 도라 버너와의 대화를 통해서나, 머거트로이드가 죽기 전 마지막에 했던 말을 전해 듣고 그로부터 진실을 이끌어냈던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더하여,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잘 흉내 낸다거나 기억력이 비상하다거나 하는 능력도 있지만 무엇보다 마플이 가지고 있는 추리에 필요한 능력은 자신에게 필요한 단서들(특히 자신의 예리한 언어적 감수성을 활용할 수 있는)을 모을 수 있도록 여러 사람들과 대화하며 필요한 정보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또 사람의 심리와 성향을 잘 파악하고 그 사람이 했을 법한, 혹은 하지 않았을 법한 행동들을 잘 파악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사건을 주도한 범인으로 여겨지던 루디 셰르츠에 대해 마플은 “수표의 금액을 바꾸거나 누군가 놔두고 간 작은 보석이 있으면 챙기거나 금고에서 푼돈을 슬쩍하는 식으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좀도둑질을 하던 잘생긴 남자잖아요. 옷을 사거나 데이트 비용을 마련하려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에 손을 댄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남자가 갑자기 리볼버를 들고 방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벌이다 총을 쏘다니.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지요. 앞뒤가 맞지 않으니까요.” 라며 뒤에서 그를 부추겨 강도 흉내를 내게 하고 몰래 그에게 다가가 총을 쏜 인물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추리를 내놓는다.

마플은 자기 자신을 “인간의 본능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을 따름이지 추리에는 소질이 전혀 없”다고 말하지만, 현대의 수사기법으로 따진다면 이것도 일종의 프로파일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이렇게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추리 방식’을 보이는 것은, 사실 꽤나 대조되는 스타일의 인물상으로 보이는 마플과 푸아로 사이의 공통점이자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 소설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플과 푸아로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매력적인 여유로움도 사람을 잘 파악하는 두 사람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마플의 경우 본인이 가진 재치, 관찰력 등의 재주와 더불어 나이 있는 사람으로서 쌓인 삶의 경험치가 이를 뒷받침한다.

황금가지 출판사 버전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손자인 매튜 프리처드가 쓴 작품 해설이 함께 실려 있는데, 그는 “이 작품은 마플 양 시리즈를 다른 추리 소설들과는 차별되는 독특한 작품으로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라고 평가한다.

이걸 읽고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이유가 될 만한 여러 가지 요소를 떠올려 보았다. 이 작품이 한 마을의 거의 모든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군상극이며 많은 인물들 각자의 이야기와 심리를 다루고 있다는 점, 작품이 집필되던 당시의 시대상이 밀접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 작중에서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암시를 자주 활용하고 있다는 점, 마플 양을 비롯해서 이 작품의 주요 내용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여성 인물이라는 점까지 네 가지이다. 하나씩 간단하게 살펴보려 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을 읽어본 건 이번이 겨우 두 권 째이지만, 두 탐정 캐릭터들이 가진 강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또 매 사건마다 많은 수의 관련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가 확실히 다양한 배경과 사상과 성향을 가진 인물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 각각의, 때로는 평범하고 때로는 뒤틀린 생각과 심리와 행동을 그려내는 데에 탁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살인을 예고합니다>>의 경우 마을 전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만큼 작중 등장인물의 수가 상당하다.(TMI를 하나 풀자면, 나는 등장인물 이름을 도저히 잘 외우지 못할 것 같아서 이름을 적어가면서 읽었다) 이 많은 수의 인물들에게 각자의 특징과 과거사와 심리적 흐름과 행동을 부여하고 작품의 큰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요소들로 적절히 사용하는 것은 애거서의 강점이자 특징인 것 같다.

작품 해설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가장 무시무시한 미스터리들은 철저히 평범한 배경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범죄의 중심에 있는 극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친근한 이야기들을 끌어내어 우리에게 일상에 숨어 있는 잔인함을 보여 준다.”라고 말한다.

이는 달리 생각해 보면 애거서 크리스티의 소설이 집필 당시의 시대상과 평범한 생활상을 잘 반영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시골 마을의 생활상이 변하고 외부인의 유입이 빈번해진 전쟁 후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마플 양의 다음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전쟁이 끝나면서 세상이 변한 게 바로 그런 부분이지요. (...) 15년 전까지만 해도 한 마을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 생판 모르는 사람이 등장하면 단연 눈에 띄었고 모두들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하면서 확실히 파악이 될 때까지 마음을 놓지 않았어요. (...)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지요. 시골마다 아무런 연고 없이 찾아와서 정착한 사람들로 가득하니까. (...) 이런 이웃들의 신상명세야 당사자가 하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외부인이 새롭게 마을에 들어와 이웃이 되었을 때, 이웃과의 거리는 이전 시대와 같이 가까운데 반해 이웃의 신분과 정체에 대해서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로 인해 생각보다 잘 알지 못할 수 있다(즉 마을에 새로 온 이웃들이 자신의 신분이나 정체를 속이고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이 작품의 주된 의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강력 스포일러 주의!) 세 건의 살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주요 범행 동기가 자신의 진짜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작중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암시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만나는 복선은 하먼 부인(번치)이 작품 초반에 언급한 <<세 번 연달아 찾아온 죽음>>이라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총 세 번 살인이 일어나고 “범인이 뻔한 것 같다가 갑자기 모든 상황이 바뀌”는 내용인데, 이는 앞으로 읽어나갈 <<살인을 예고합니다>>의 내용 전개와 같다.

또 마플이 살면서 접한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들을 한참 소개하는데 이 사연들이 알고 보면 치핑 클레그혼 마을 사람들의 비밀과 하나씩 연결되는 유사한 사례들이다. 이 장면이 절묘한 이유는, 마플의 연륜과 경험이 쌓아준 일종의 인간 데이터베이스를 보여주면서 마플의 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명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소설에서 앞으로 나올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암시하는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크레독 경위에게 번치와 마플이 마을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공연한 불법 물물교환에 대해 설명하는데, 여기서 나온 대표적인 물품 중 하나인 버터가 이후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다시 등장한다.

샬럿이 예상치 못하게 사망한 자신의 언니 레티셔의 신분으로 살면서 레티셔의 몫이 될 거부 괴들러의 유산을 샬럿이 대신 받는 일에 대해, 도라와 샬럿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지난번에 얘기한 버터 같은 거야.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받는다고 해서 죄가 되지는 않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당시 영국의 시골 마을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범인의 심리 상태에 대한 일종의 기호가 된다.

이전까지 살펴본 점들이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 전반과 관련한 특징에 가깝다면, 이번에는 해설에서 언급된 ‘마플 양 소설의 차별점이자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더 가깝다.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소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역들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이다. 탐정도, 범인도, (루디 셰르츠를 제외한) 피해자들도 모두 여성 인물이다.

게다가 이들은 ‘나이 든’ 여성 인물들이면서도 할머니 캐릭터를 떠올릴 때 쉽게 떠올리는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난 지점들을 가지고 각자의 캐릭터성을 확실히 부여받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탐정 역할을 하고 있는 마플 외에도, 여러 건의 교묘한 범행을 저지르는 적극성을 보이는 레티셔 블랙록은 범인으로 밝혀지기 전에도 리더십이 있으며 조금 허술한 성격인 도라 버너를 챙기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한편 힌클리프와 머거트로이드 사이의 관계는 레티셔 블랙록과 도라 버너의 관계와 유사성을 가지고 대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리틀 패덕스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함께 살고 있는 레티셔 블랙록과 도라 버너, 볼더스라는 집에 함께 살고 있는 힌클리프 양과 머거트로이드 양 모두 친구와 함께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레티셔 블랙록과 힌클리프는 리더십 있고 똑 부러지는 유형의 인물인 반면, 도라 버너와 머거트로이드는 조금 허술한 면이 있지만 사건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 혹은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범인에게 살해당한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특히 힌클리프와 머거트로이드는 크래독 경위와 마플의 수사와는 별개로 자신들이 루디 셰르츠가 죽은 사건 현장에서 직접 본 것들을 바탕으로 독자적으로 범인을 밝혀내려는 시도를 하며, 그로 인해 머거트로이드가 살해당하게 되는 만큼 사건 해결에 있어서도 상당히 개입된, 적극성을 보이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범인이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마플과 (리틀 패덕스의 외국인 요리사인) 미치가 적극적으로 행동해서 범인을 현장 검거하는 클라이맥스 역시 추리 소설에서 여성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어쩌다 보니 글이 살짝 길어졌다. 생각해 보면 셜록 홈즈를 읽었다면 이렇게 글을 쓰지 못했을 것 같은데(아마 재미있었다만 반복했을지도), 그전까지는 잘 몰랐고 특별히 애정도 없던 애거서 크리스티 작품으로 나도 모르게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걸 보면 재미있게 읽었다는 강력한 증거 아닐까?

어느 영역, 어느 장르던 간에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에는 확실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작품 스스로 증명하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