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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텍스트

구연상, <<AI 몸피로봇, 로댕>>, 아트레이크, 2024.

by 마들렌23 2025. 4. 30.

 

제목: AI 몸피로봇, 로댕
저자: 구연상
발행처: (주)아트레이크ARTLAKE
발행일: 2024년 2월 28일


구연상, &lt;&lt;AI 몸피로봇, 로댕&gt;&gt;, 아트레이크, 2024.
표지

 

 

‘소설의 재미’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이야기의 긴장감과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즐기는 것에서 소설을 읽는 재미를 찾을 것이고, 어떤 이는 소설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주제의식과 질문, 소설에서 파생되는 철학적 질문들을 사유하는 것에서 소설의 재미를 찾을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고루 갖출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든 항상 최고, 최선일 수만은 없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만 갖추었다고 해서 그 소설이 무의미하거나 읽을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고, 어쩌면 부족하거나 숨겨진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는 과정 역시 소설을 읽는 재미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인공지능과 안드로이드 로봇에 대한 다양하고 유의미한 사유를 담고 있는 반면,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소설의 역할에는 아쉽게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를 하고 싶다.

우선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보자면 다음과 같다. 스포주의!

철학 교수인 주인공 우빈나는 인공지능 로봇 연구소에서 인공지능 로봇 제작과 관련한 각종 윤리, 철학 자문을 맡고 있다. 우 교수는 연구소의 기술력을 탈취하고 싶어 하는 외부 세력의 해킹 공작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환자가 되고, 연구소에서는 우 교수도 제작에 참여한 인공지능 돌봄 로봇이자 전신 마비 환자가 직접 입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수트형 로봇인 로댕을 제공한다. 몸피 로봇인 로댕과 로댕의 몸소가 된 우빈나 교수. 우 교수는 로댕과 함께 지내는 삶에 적응하려 노력하면서, 연구소의 일에도 여러 가지로 얽히게 된다.

소설의 재미라는 관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야기에 긴장감이 덜하고 에피소드들이 성기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소설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만들고 몰입감을 강렬하게 이끌어내지 못한다. (소설의 분량도 적지 않은 편이다 보니 이런 인상이 더 강한 부분도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입장이긴 하지만, 한 명의 독자로서 왜 이 작품에 대해 이런 느낌을 받게 되었을까, 이 소설의 어떤 면이 이런 인상을 주었던 것일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우 교수는 나이가 지긋한 교수이자 화목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이며, 무엇보다 철학자로서 성숙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로 그려진다. 로댕 역시 우 교수의 자문을 바탕으로 상당히 성숙한 사고 체계를 획득하고 있으며 성능이 뛰어난 인공지능으로 그려지고 있다. 우 교수와 로댕이 합쳐지면서도 사건이 될 만한 두 인물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고, 성숙한 내면을 가진 두 인물이 조화를 금세 이루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론 우 교수의 우울이 자살 소동으로 번지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 에피소드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거의 유일하게 우 교수와 로댕의 의견이 엇갈려 갈등이 생기는 부분이기도 하고, 우 교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로댕이 우 교수의 죽음을 막기 위해 강제로 자신을 고장 낸다는 적극적 행동을 선택하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인공이라면 캐릭터 아크는 플랫 아크가 되고, 주인공의 캐릭터 아크가 플랫 아크가 된다면 주인공이 이미 가지고 있는 내적 가치관이 궁극적으로 주인공의 주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를 가져오는 과정들이 서사의 줄기를 이루게 된다. (이 소설 역시 크게 보았을 때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우빈나라는 인물과 우빈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로댕이라는 인공지능 로봇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플랫 아크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유형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내적 변화가 거의 없는 만큼 사건이 더 복잡하고 긴장감을 주어야, 즉 주인공과 세계 사이의 투쟁이 더 격렬해야 소설이 이야기로서 재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부분이 좀 아쉬웠다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행동하기보다는 말하는 인물인데,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주인공의 의견에 동의하고, 주인공이 주변 인물들에게 이미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설득은 거의 항상 주인공의 의견대로 이루어진다.

몇몇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의 의견에 반대하는 인물들이나 인공지능 기술력을 탐내면서 주인공 쪽 인물들과 적대하는 외부 세력이 나오긴 하지만, 그들은 단역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필요한 에피소드에 와서야 금방 등장해 소개되었다가, 대적자의 역할을 다한 뒤 결국은 주인공에게 감화되거나 패퇴해 퇴장하고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만큼 강렬하고 지속적인 주인공의 주 대적자(안타고니스트)가 없는 것이다. 굳이 따지면 소설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번째 몸피로봇 한나와 한나의 몸소 강소영 사장이 안타고니스트이자 우빈나-로댕과의 대비를 이루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임팩트가 조금 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의 긴장감이란 독자의 호기심과 질문(소설 초반부에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를 주인공이 맞닥뜨리게 하고, 주인공이 이 문제를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해결 지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이야기 내내 계속 일으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고 또한 그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잘 이끌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은 그런 부분에서 조금 힘이 약했던 것 같다.

몇몇 에피소드가 어느 정도 강한 인상을 주기는 했지만 하나의 줄기로 엮이는 힘이 약했고, 이렇게 몇몇 에피소드가 간간이 주는 약간의 긴장감으로 소설 전체를 감당하기에는 소설의 분량이 길었다. 재미만을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독자는 금세 지쳤을 것이다.

소설 한 권을 쓰기 위해 고민하고 조율해야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을지 또 그 작업이 얼마나 지난한지 생각해 보면 좋은 소설을 쓰는 일은 정말 대단하고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이 소설은 많은 부분이 인공지능과 관련된 철학적 사유에 관한 문답과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어찌 보면 이 소설에서 정말 중요한 부분은 에피소드나 사건보다는 이 문답들의 내용인 것 같았다.

이러한 긴 문답들 역시 소설의 긴장감이나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는 면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해당 대화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화두들은 생각해 볼 것들이 많아서 유익한 내용들이었다.

저자는 인공지능과 인공지능 탑재 로봇과 점점 더 많이 어울려 살아가게 될 현대의 급속한 기술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어떤 개념을 정립하고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할 지에 대해 우빈나 교수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특히 돌봄 로봇을 주 소재로 삼고, 돌봄 행위를 통해 인간과 긴밀하게 관계 맺을 인공지능과 로봇의 새로운 관계가 어떤 형태여야 할지, 그러기 위해 로봇을 만드는 이들이 어떤 철학적 방향성을 가지고 로봇을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몇 가지 인상 깊게 남은 테마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 보면,

먼저 인공지능/로봇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로댕은 우빈나 교수를 보호한다는 목적과 몸소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어길 수 없는 원칙 사이에서, 자살하려는 우빈나 교수를 막기 위해 스스로 어쩌면 영구적이게 될지도 모르는 작동 중지를 선택한다. 이 이후 로댕은 로봇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결국 우빈나 교수를 통해 죽을 권리를 얻는다.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몸피 로봇 한나 역시 여러 악행을 저지르지만 그 궁극적인 요구는 자신의 죽을 권리였다.

이 소설에서 말하는 로봇의 죽음은, 작동 정지 이후 해체되어 부품이 재사용되거나 메모리가 활용되는 일 없이 온전하게 작동 정지로 끝나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몸피 로봇/인공지능은 고도로 발전해 인간과 거의 대등한 의식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데, 로봇이므로 사실상 영원히 살 수 있을 존재들이 인간과 유사한 죽음을 바란다는 발상이 흥미로웠다.

또 저자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로봇은 로봇의 얼굴을 가져야 하고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문답의 내용인 만큼 저자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것은 결국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처럼 인식되기 쉽게 만들어져 있을 때 인간은 쉽게 속으며, 이 속아 넘어 감이 로봇/인공지능에게 인간을 통제하고 뛰어넘을 만큼 지나치게 강력한 힘을 부여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인공지능이 점점 더 인간과 유사해지고 점점 더 구별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미래 예측과 관련하여,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인공지능을 받아들이고 인공지능과 상호작용하는 인간이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미지화하느냐가 아닐까?

인간은 쉽게 의인화하고, 얼굴이 없는 곳에서도 얼굴을 찾아낼 만큼 얼굴에 민감하다. 상대의 얼굴을 통해 인간은 소통하고 관계 맺는 데 있어서 수많은 정보, 특히 감정과 관련된 정보를 얻어내고 처리한다. 인간처럼 말하고 반응하고 공감하는 듯한 행동 방식을 학습해 보여주는 인공지능/로봇에게 인간과 구분이 어려운 외형과 얼굴까지 갖춰진다면 인간은 그 인공지능을 인간처럼 여기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인공지능/로봇에게는 그들만의 얼굴을 주고 인간과는 구분되도록 만듦으로써, 로봇을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 -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되는 로봇 사이의 상하 관계를 서로 분명히 인식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도의 의식을 가진 로봇이 사람과의 사이에서 감정적이고 가까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로댕과 우 교수의 관계처럼 서로 감정과 생각을 나누며 생활의 대부분을 한 몸처럼 공유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로댕이 로봇이고 우 교수가 사람이며 둘은 다른 존재성을 가지고 있음을 서로 잊지 않는 관계가 이상적이라고 소설의 저자는 주장하는 듯하다.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과 점점 구분하기 힘들어지는 로봇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인간과 로봇의 구분선을 더욱 명확하게 (더 나아가서는 제도적인 힘을 통해서까지) 그어놓음으로써 해결하자는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보수적이며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한 평화로운 관계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인공지능/로봇이 인간보다 능력 면에서 인간보다 더 뛰어나졌을 때 그들이 인간이 제시한 상하관계를 유지하려 할지, 혹은 인공지능/로봇이 인간과 유사한 고도의 지성체로서 인정되게 된다면 그때에도 이러한 상하관계가 유지될 당위성이 정말 있는지를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면으로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관점에서 인간과 기계, 나아가서는 인공지능의 융합을 생각하고 실현하려 하는 이들에게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하는 식의 방안은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을까?

아직 실제로 도달하지 못한 기술이지만 동시에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듯한 미래의 기술을 다루는 문제이니만큼 정답이 있을 수 없기에 더욱 생각이 많아지는 부분이었다.

그 외에도 저자는 순우리말 혹은 실생활 단어들을 조합해 인공지능 혹은 로봇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와 표현들을 새롭게 조형하려는 시도를 소설 곳곳에서 하고 있다.

순수하게 재미있고 이야기가 탄탄한 sf 소설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지만, 인공지능과 관련해 생각이 많거나, 더 생각할 거리를 원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은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