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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텍스트

그렉 이건, <<쿼런틴>>, 허블, 2022.

by 마들렌23 2024. 12. 31.

 

제목: 쿼런틴

저자: 그렉 이건

옮긴이: 김상훈

발행처: 허블

발행일: 2022년 12월 21일

 

 

그렉 이건, &lt;&lt;쿼런틴&gt;&gt;, 허블, 2022.
표지

 

 


<<쿼런틴>>은 1992년 출간된 하드 SF 장르에 속하는 장편 소설로, 작가 그렉 이건의 데뷔작이다. 제목인 quarantine은 격리를 뜻하는 말로,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소설의 배경 설정을 단번에 설명하는 제목이다.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세계관 설정을 설명하는 부분이자 주인공이 사건에 연루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 주로 이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사전 정보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조금은 지루하다거나 어렵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 뒤로 가서 양자역학을 다루기 시작하면 더 어려워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하드 SF 소설의 부흥을 견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납득이 될 정도로, 과학적으로 엄밀하고자 하면서도 흥미를 놓치지 않는 설정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소설이 출간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충분히 세련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크게 두 가지 설정이 있는데, 하나는 ‘버블’이다. 소설 속 현재 시점에서 태양계는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막으로 외우주와 완벽히 분리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정체불명의 막을 소설에서는 ‘버블’이라고 부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버블’로 인해 지구에서는 더 이상 별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쿼런틴’이라는 소설의 제목은 이렇게 우주와 격리된 지구의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격리가 발생한 이유에 대해서는 2부에서 닉과 포콰이라는 인물의 논의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갑작스러운 ‘버블’의 출현으로 인해 당시 사회에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버블열’이라는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종말론이 유행하며, ‘버블’ 현상을 바탕으로 한 각종 사이비 종교 집단이 생겨나기도 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사람들은 별 없는 밤하늘에 익숙해져 갔다는 배경 설정을 바탕으로, 소설은 이 ‘버블’ 사태 후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또 한 가지 설정은 ‘모드’이다. 소설 속에서는 사람의 뇌에 모드라는 것을 설치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기억 저장과 정보 처리, 연산 등을 보조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신체의 생체 반응, 감정 반응 등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하거나 가치관 혹은 사고의 경향까지도 조정할 수 있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닉 역시 첫 장면부터 자신에게 설치한 각종 모드들을 활용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닉은 전직 경찰로 ‘버블’ 사태 이후 생겨난 사이비 종교 테러 집단 ‘낙원의 아이들’로 인해 아내 캐런을 잃은 뒤 현재는 사립 탐정으로 일하고 있는 인물이다.

닉은 모드를 설치해 스스로를 아내를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나 고통을 생리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고, 캐런의 환영을 볼 수 있도록 만든 채 살아가고 있다. 어찌 보면 스스로를 일종의 생체 기계처럼 다루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유전자 변형한 모기를 정찰용 드론처럼 사용하기도 하는 세계관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이에 대한 닉의 변론도 2부에서 들어볼 수 있다.

1부의 이야기는 사립 탐정 닉이 익명의 의뢰인으로부터 실종된 로라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사라지기 전 로라는 경비가 삼엄한 요양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태어났을 때부터 과학적으로 정확히 규명되지 못한 치명적 뇌 손상을 입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으나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닉은 로라의 흔적을 따라 뉴 홍콩으로 이동하고, 그곳에서 로라의 납치와 관련된 한 회사에 잠입해 로라를 발견하지만 금세 로라를 납치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닉은 그들이 자신에게 충성 모드를 설치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런 상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임무를 받아 한 회사로 파견된다.

2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양자역학과 관련된 내용이 펼쳐진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기반한 작가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의 입을 빌어 양자역학의 기본 개념과 그를 바탕으로 한 세계관 설정을 풀어나가고 있는데, 최대한 쉽고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명하려 하는 작가의 노고가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1부에서보다 더 복잡한 설명들을 읽어 나가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닉은 한편으로 여전히 로라가 요양병원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로라는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도 두 번이나 병실 바깥에 나온 상태로 발견된 적이 있었고, 닉이 로라를 발견했을 당시에도 잠긴 방 밖에 탈출한 상태였다) 이유를 궁금해하면서, 충성 모드에 따라 포콰이라는 여성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포콰이는 어떤 실험을 수행 중이었는데, 닉은 그 실험이 로라의 탈출을 가능하게 한 불가사의한 능력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포콰이와의 대화를 통해, 포콰이가 실험하고 있는 능력은 양자역학적 개념을 활용해 목표로 한 결과가 이루어진 버전의 가능 상태를 선택적으로 ‘수축’시키는 것임을 알게 된다.

소설에서는 관찰자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가능성들이 공존하는 것을 ‘확산’, 관찰자의 관찰로 인해 모든 가능한 상태들 중 한 가지가 선택되며 나머지 가능 상태들이 사라지는 것을 ‘수축’이라고 부른다. 소설에서는 포콰이와 닉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이들의 추론을 따라가며 소설의 설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우주는 확산된 상태로 존재해 왔으나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어느 순간 관찰자로서 가능 세계를 수축시킬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으며, 그 순간부터 인간의 시선이 닿은 밤하늘의 우주가 수축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확산된 상태로 살아가던 수많은 존재들을 ‘살해’ 한 것과 마찬가지 결과를 냈다. 그래서 지구가 격리되어야 했던 것이다.

양자역학적 확산과 수축에 대한 이야기는 곧 현재와 일상에 대한 개념적 도전으로 이어진다. 일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은 무너지고, 과거-현재-미래의 흐름을 가진 선형적 기억을 바탕으로 구성된 한 개인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은, 펼쳐진 가능성들 중 선택된 어떤 일련의 개연성들의 집합으로 대체된다. 현재는 수많은 다른 가능한 자기 자신들을 살해하고 남은 수축된 순간이며, 우리가 느끼는 시간적 연속성 안의 현재와 나는 이 수축된 순간들을 인간의 인식이 일련의 흐름으로 엮어 인지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버블>은 (...) 인류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갇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무한대의 자유라는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강제로 직면해야 했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소설의 내용이 진행되면서 닉은 포콰이와 유사하게 확산과 수축을 다루는 능력을 얻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면 먼저 확산한 다음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다다르는 버전의 자신으로 수축하는 식인데, 이 능력을 훈련하고 사용하는 장면들을 읽다 보면 확산된 상태의 닉이 일련의 행동을 이어가다 실패하거나 막히는 상황에 도달했을 때 급작스럽게 글이 끊기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서 성공한 버전으로 수축된 닉의 상황이 서술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패한 버전의 닉은 수축 과정에서 삭제된다는 것을 글의 흐름으로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글이 갑자기 뚝 끊어질 때 가차 없는 삭제의 서늘함을 직접 경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스토리가 후반부로 갈수록 닉은 지금의 자신이 확산되지 않고 하나로 수축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할 상황에 처하며 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닉이 수많은 일을 겪은 뒤에 향하는 곳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세계의 진리가 아니라 지금 당장 자신의 앞에 놓인 일상, 현실이다.

“지구는 여전히 확산한 상태인지도 모른다. (...) 모든 꿈. 모든 비전. 그중에는 이 세계도 포함되어 있다. 범용 하고, 무한한 행복과 무한한 고통의 중간께에 위치한 세계. / 그리고 지금 나는, 어둠을 올려다보며, 내가 응시하고 있는 것이 무한인지, 아니면 내 눈꺼풀 안쪽인지 의아해하고 있다. / 그러나 해답을 알 필요는 없다. (...) 모든 것은 결국 평범한 일상으로 귀속되는 법이다.”

소설을 통해 저자는,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며, 매 순간 내가 나로서 존재하며 정의되고 구성될 때 그와 동시에 떨어져 나가고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사유를 SF적 상상력을 통해 풀어내려 끊임없이 시도한다. 여기서 나는 결국 수많은 ‘나’=자아들이 모인 세상으로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결국 양자역학을 빌어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인생에 대한 비유로 작용하고 있다. 수많은 선택이 모여서 지금의 나와 나의 현재를 이루고 있으며, 그 선택들은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을 제치고, 소설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살해하면서’ 이루어져 왔다. 그런 만큼 나는 지금의 나, 여태껏 이루어 온 선택들의 총합인 나에 대해 책임이 있다. 또한 이것은 어쩌면 선택되지 못한 가능성들에 대한 책임일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의 존재성 자체가 불완전하게 느껴지고 의심스러워지더라도, 내가 정말 나인지, 내가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현재를, 일상을,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읽는 내내 재미있었고 문득문득 스치듯 다시금 떠오르는 오래된 사유도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닉과 포콰이가 모드를 설치해 생리적 반응을 변화시킨 자신은 자신인가 자신이 아닌가에 대해 논쟁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