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 내가 그를 죽였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
옮긴이: 양윤옥
발행처: (주)현대문학
발행일: 2019년 7월 25일(개정판)
추리 소설, 그중에서도 본격 추리 소설이라 불리는 장르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요소들 중 하나는 독자와 작가 간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기발한 트릭으로 범행을 저질러 사건의 전말을 미스터리에 빠트린 범인과 단서를 바탕으로 그것을 풀어나가는 탐정의 대결이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동안, 독자는 스토리를 따라가며 (주로 범인을 추적하는 탐정의 시점을 따라가게 된다) 탐정이 모으는 단서를 함께 공유하고, 작가가 심어놓은 서술 상의 힌트 혹은 함정을 간파해 가며 탐정이 진상을 모두 말해주기 전까지 (즉 작가가 해답을 공개하기 전까지) 한 발 먼저 범인을 밝히려 시도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 추리 소설이라면 작가는 단서를 공정하게 제공해야 한다. 서술 트릭으로 교묘하게 생략하거나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부드럽게 지나가는 것은 괜찮지만, 아예 잘못된 정보를 주거나 반드시 필요한 정보를 아예 주지 않다가 해답에서 밝히는 것은 공정성을 해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나처럼 그냥 넘어가는 독자들도 많겠지만.)
이렇게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퍼즐 풀이 대결은 상당히 메타픽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전통(?) 혹은 장르적 약속이 ‘본격’이라는 이름이 붙은 하위 장르에 포함된다는 것도 꽤나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내가 그를 죽였다>>는 이러한 독자와 작가 사이의 풀이 대결이라는 요소를 극한으로 끌고 가는 소설이다.
두 소설은 가가 형사 시리즈에 속하는 소설들로, 가가 교이치로라는 캐릭터가 탐정 역할을 맡는다.
첫 작품인 <<졸업>>에서는 가가의 대학시절을 다루며 가가의 친구들이 연루된 살인 사건의 진실을 밝힌다. 이를 시작으로 진행되는 시리즈와 함께 가가 역시 나이가 들어가며 인생의 변화를 겪게 되고, 형사로서 활약하게 되는 캐릭터 자체의 서사도 시리즈 전반에서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냉철한 추리력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인간적이고 따뜻한 면도 함께 보여주는 캐릭터로,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사랑하는 탐정 캐릭터라고 한다.
시리즈가 끝난 것 같았던 와중에 최근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소설을 쓸 정도이니만큼 확실히 저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 캐릭터와 시리즈가 아닐까 싶다.
그중에서도 제목의 형식이 유사한 세 권,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 <<내가 그를 죽였다>>, 그리고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의 경우 형식상의 특징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소설 내용에서는 단서들만 주고 끝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 것이다.
뒤에 범인이 누구인지 정답을 알려줄 듯 해설서가 봉인 상태로(!) 붙어있지만, 봉인을 풀고 읽어봐도 범인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대신 범인을 밝히는 데 필요한 논리적 해설을 제공해서 범인이 누구인지 유추할 수 있게 한다.
독자는 끝까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는 범인을 맞추기 위해 작가가 제시하는 퍼즐 풀이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로 인해 봉인된 해설을 뜯고 읽는, 독자의 물리적 행동까지 유도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해설지는 니시가미 신타라는 일본의 추리소설 평론가가 쓴 것으로, 작가가 아닌 평론가가, 작품의 뒤에 덧붙일 글로 평론이 아닌 작품 이해를 위한 해설을 쓰는 것도 꽤나 흥미롭다. 해설은 짧은 대본의 형식으로 조교와 교수의 대화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평론가 본인이 조교로 등장하며, 나름의 서사와 캐릭터가 존재한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의 해설에서는 조교와 교수로, <<내가 그를 죽였다>>의 해설에서는 교수가 은퇴한 상태라는 것이 대화 초반에 언급되며, 최근에 나온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에서는 조교가 드디어 교수가 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의 해설에서는 <<내가 그를 죽였다>>를 다음 단계 난이도의 퍼즐을 소개하듯 추천하고 있기도 하다. 추리 소설 뒤에 첨부된 해설이라는 새로운 형식 안에서도 흥미로운 시도들이 여럿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다룰 소설은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내가 그를 죽였다>> 두 편이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아직 읽지 못했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서는 두 명, <<내가 그를 죽였다>>에서는 세 명의 용의자가 등장하고, 사망한 피해자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이들 중 누가 진짜 살인을 저질렀는지를 밝혀내는 게 사건을 이끌어가는 중심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각각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후로는 스포일러 주의!)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서 피해자는 이즈미 소노코라는 여성이며, 소설은 소노코의 오빠인 이즈미 야스마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소노코와 금요일 밤에 통화한 이후, 야스마사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 소노코의 집에 찾아갔다가 자살한 듯 보이는 소노코의 시신을 발견한다.
교통경찰인 야스마사는 소노코의 집을 살펴보던 중 결정적인 단서를 발견하고 소노코가 살해되었음을 확신한다. 야스마사는 자신이 직접 범인을 밝혀내고 복수하기 위해 일부러 현장을 훼손하고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따로 챙기며, 경찰이 소노코의 죽음은 자살이라 결론 내리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가가 형사는 유일하게 소노코의 자살에 의구심을 가지고 사건을 파헤쳐가기 시작한다.
야스마사는 개인적인 수사를 통해 소노코의 친구 유바 가요코와 소노코의 전 연인 쓰쿠다 준이치가 소노코의 죽음과 연관된 주요 용의자임을 알아채고, 가가 형사 역시 진실을 추적해 야스마사의 뒤를 바짝 쫓아온다.
가가 형사는 야스마사의 의도를 알아채고 야스마사의 사적 복수를 말리려 하고, 야스마사는 가가 형사가 진실을 자신보다 먼저 알아낼까 경계하면서도 서로 수사 정보를 주고받는다. 결국 야스마사에 의해 두 명의 용의자와 가가 형사까지 모두 사건 현장에 모인 상황, 야스마사의 복수와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반전을 거듭하며 극단으로 치닫는다.
<<내가 그를 죽였다>>의 피해자는 호다카 마코토라는 남성으로, 유명 작가로 데뷔했지만 영화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지만 실질적인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약혼녀 간바야시 미와코는 시인으로, 호다카는 그녀의 시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미와코에게 접근했다.
미와코의 오빠 간바야시 다카히로는 미와코와 근친상간 관계였는데, 미와코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하고 호다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한편 호다카의 동창이자 담당자인 스루가 나오유키 역시 호다카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일을 벌이기만 하고 수습을 못하는 호다카의 뒤처리를 하느라 고생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여성 관계가 지저분한 호다카에게 자신의 짝사랑 상대인 나미오카 준코를 빼앗긴 걸로도 모자라 호다카에게 장난감처럼 대해지던 준코는 결국 호다카의 결혼 소식을 듣고 절망해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다카와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여성 한 명이 더 있는데, 바로 미와코의 담당 편집자인 유키자사 가오리이다. 호다카 마코토는 결혼식 전날에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자살한 준코의 시신을 스루가와 함께 준코의 집에 다시 데려다 놓아 그녀의 사망을 숨기면서까지 결혼식을 차질 없이 진행시키고 싶어 하지만, 결혼식 당일에는 그 자신이 사망하고 만다.
그의 사인은 평소 그가 먹던 비염약을 누군가가 독약으로 바꿔치기했기 때문이었다. 피해자에게 원한을 가진 용의자는 셋, 소설은 그들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진행되고, 이들은 준코가 자살하기 전 호다카를 죽이려 했다는 쪽으로 수사 방향을 몰아가려 한다. 하지만 미와코와 가가 형사는 이런 설명에 의구심을 품고 사건의 진짜 전말을 찾으려 한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의 경우 가가 형사의 인간적인 면이 매력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여동생의 복수를 위해 수사를 고의로 방해하며 혼자 범인을 찾고 있는 이즈미 야스마사와 술을 마시며 복수를 그만두도록 설득하는 장면이 이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반면 가가 형사의 탐정으로서의 능력을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가가 형사가 야스마사를 의심하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추리를 일부 들려주고 자신이 가진 정보를 야스마사와 교환하기도 하는 장면들일 것이다.
이 소설은 야스마사의 시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야스마사의 관점에서 자신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그리고 자신의 뒤를 바짝 뒤쫓아 오는 가가 형사에 대한 압박감이 더 잘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가 형사가 야스마사를 찾아오고 야스마사가 긴장할 때마다 탐정으로서 가가 형사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강조된다.
이 소설이 구조적으로 독특한 점은 탐정 역할이 누구인가 하는 부분에 있다. 야스마사는 시점 인물이자 살인 현장의 증거를 독식한 채 혼자의 힘으로 사건을 추적해 나가는 탐정의 역할을 한다.
독자는 야스마사의 시점을 따라가므로 실질적으로 야스마사의 조사와 추리를 따라가게 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탐정 소설의 탐정 역할은 야스마사가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야스마사는 살인 사건을 자살 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현장을 적극적으로 조작하고 독자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따라간다.
시리즈의 주인공이자 탐정인 가가 형사는 일종의 이중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게 되는데, 야스마사의 방해 공작을 가려내면서 그 사이에서 진짜 단서를 찾아 소노코를 죽인 진범을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는 가가 형사의 추리 과정을 직접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가가 형사가 야스마사에게 들려주는 설명을 통해 어떤 식의 사고 과정을 거치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서로 목적이 다른, 하지만 진범을 밝혀낸다는 목표는 동일한 두 명의 탐정이 있는 것이고,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노코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는 명확한 하나의 문제가 제시되고 있으면서도 소설 내용 상에서는 (특히 가가 형사의 입장에서는) 꽤나 복합적이고 중첩된 수수께끼의 구조라는 것이 이 소설의 구성을 흥미롭게 만든다.
거기다 그만큼 복잡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추리력으로 진실을 찾아내는 데다가 동시에 야스마사의 복수를 막으려고 애쓰는 모습까지 그려냄으로써 캐릭터로서 가가 형사의 매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고, 가가 형사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만큼 그와 맞서는 야스마사 역시 꽤나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는 점도 저자의 영리한 한 수였다. 두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고 탐색하고 때로는 공감하거나 협력하는 모습이 두 인물 모두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의 경우 후반부에 들어서면 어느 정도까지는 정석적인 본격 추리 소설의 흐름을 따라간다.
모든 관련 인물들이 모여서 사건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조금씩 사건의 전말이 밝혀져 가는 것이다. 사건의 전말에 있어서도 작은 반전들이 계속되면서 앞에서 나온 모든 단서들이 설명되고 사건 전반의 진실들이 드러나지만, 결국 소노코를 죽인 단 한 명의 범인을 두 용의자 중 어떻게 구분해 내는가에 대한 문제는 끝까지 남겨 놓는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가가 형사와 야스마사는 답을 알아내고 완전한 사건의 해결을 맞이하지만, 독자들이 끝까지 정답을 탐정의 입을 통해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소설 전체의 내용을 통해 단서를 뿌리는 작가와 그것을 착실히 모아서 작가가 낸 문제, 즉 범인의 정체를 먼저 알아채려는 독자 사이의 대결은 작가가 공정하게 단서를 주었고 소설의 끝에서는 공정한 정답, 즉 범인의 정체를 알려준다는 암묵적이고 관례적인(?) 약속 혹은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그 끝에서 소설의 서사 상으로는 사건을 마무리 지으면서도 독자에게는 정답을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틀을 잘 지키면서도 완전히 벗어나는 작가의 선택 혹은 시도는 소설이 출간된 지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까지도 흥미롭고 신선하다.
<<내가 그를 죽였다>>는 소설의 구성 측면에서 여러모로 특이하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일단 세 용의자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소설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사건을 해결해야 할 탐정인 가가 형사는 소설의 중반부에서나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이 독특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재미있는 점이자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심 수수께끼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제목이 드러내듯 모든 용의자가 각자 자기 시점에서 자신이 그를 죽인 것처럼 구는 태도를 드러내며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 사람 모두 각자의 시점에서 초반부 피해자가 죽었을 때 자신이 한 일처럼 성공을 기뻐하는 듯 서술되고, 또 수사 과정에서는 각자 자신이 의심받지 않으려 하며 범행을 숨기려고 하고, 마지막에는 각자 자신의 범행 불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소설의 제목이 된 ‘내가 그를 죽였다’는 선언의 아이러니함은 여기서 발생한다. 진짜 범행을 실행한 범인은 셋 중 단 한 명이므로 ‘내가 그를 죽였다’는 세 용의자의 선언은 그것이 세 명 모두의 선언이라는 점에서 거짓이지만, 동시에 셋 중 한 명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되므로 완전히 거짓은 아니다.
동시에 ‘내가 그를 죽였다’는 문장은 세 용의자 모두에 의해 선언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셋 모두에게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로 부정당한다.
세 명의 용의자 모두가 독자에게 자신이 그를 죽인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듯 보이지만, 최후반부 진실의 순간에서는 세 사람 모두 그동안 (작가의 서술 트릭으로) 숨겨두거나 중요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슬쩍 언급하고 지나갔던 요소들을 근거로 들어 자신이 그를 죽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려 하는 것이다.
이렇게 후반부에서 모든 용의자가 피해자를 죽일 수 없었다는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곧바로 뒤이어 모두가 피해자를 죽일 수 있는 추가적인 가능성이 드러나면서 독자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더 복잡해진다.
수수께끼라는 측면에서 <<내가 그를 죽였다>>는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에서는 다른 모든 단서들을 거의 다 사용하고(즉 소설 앞쪽 내용에서 언급된 거의 대부분의 단서, 암시, 복선들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마지막까지 독자들에게 범인을 헷갈리게 만드는 문제는 한 가지만 남아있었다.(스포일러를 하자면, 용의자들이 각각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를 밝혀내는 문제만이 남는다. 용의자들이 왼손잡이인지 오른손잡이인지만 판단할 수 있으면 범인을 밝혀낼 수 있다.)
반면 <<내가 그를 죽였다>>에서는, 후반부에 모든 용의자와 관계자가 모여 대화하는 과정에서 몇 번의 반전을 주는 것은 유사하지만 그 반전들은 결국 ‘세 용의자가 모두 범행이 불가능했다’는 명제에서 다시 ‘세 용의자가 모두 범행이 가능했다’는 명제로 향하기 때문에, 소설의 앞에서 등장한 모든 단서와 복선들이 상당수 남아 있는 상태에서 어떤 단서가 사용되지 않았는지 파악해야 독자가 범인의 정체를 추리할 수 있게 된다.
각 용의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교묘하게 감출 수 있도록 세 용의자의 시점을 효과적으로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저자의 서술 전략과 이 부분이 맞물리면서 독자와 작가 사이의 대결을 한층 더 흥미롭게 만들고 있다.(하지만, 추리 소설을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은 소설을 다 읽고 범인까지 알아낸 뒤에는 트릭이 생각보다 참신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범인이 정해져 있으면서도 소설 내에서 범인을 끝까지 언급하지 않는 시도 자체가 상당히 파격적이고 흥미로운 것이지, 범행의 트릭 자체의 기발함은 그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트릭의 참신함이라는 기준은 독자 개인의 추리 소설 독서 경험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주관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서 가가 형사는 이미 범인을 찾아냈는데,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범인은 당신”이라고만 말하는 식으로 서술되는 것도 독서 경험의 측면에서 흥미롭게 연출된 부분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대사, “범인은 당신입니다.”가 마치 독자를 호명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독자는 여태껏 피해자를 살해할 고의로 가득했던 용의자 세 사람, 특히 그중 한 명이 진짜 범인이므로 어찌 보면 범인의 시점으로 지금까지의 소설 내용을 따라왔고 그에 몰입하도록 유도되어 왔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가가 형사가 범인의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당신”이라고 지목하는 것이 마치 소설 바깥에서 범인과 용의자들에게 몰입하면서 여기까지 온 독자가 지목당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최근 새롭게 나온 가가 형사 시리즈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메타적 요소도 이와 비슷한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 지은 소설의 결말은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데,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의 결말은 독자들만 정답을 듣지 못했을 뿐 소설의 서사는 마무리가 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내가 그를 죽였다>>의 경우 서사의 절정, 범인이 밝혀질 바로 그 장면에서 소설이 끝나버리는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이런 느낌에는 가가 형사의 “범인은 당신입니다.”라는 마지막 대사도 한몫한다.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이 부분에서 범인의 이름이 탐정의 입으로 언급되며 긴장감이 최고조를 찍고, 그 뒤로 탐정이 범인을 찾아낸 결정적인 단서와 사고 과정을 설명하고, 범인이 인정하거나 디테일을 더 설명하는 등 내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서 긴장감이 하강세를 타는 상태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당신’이라는 호명으로 범인의 이름을 가린 채 긴장감의 고점에서 소설을 끝내는 전략으로 서사 구조상의 파격을 시도함과 동시에 독자에게 새로운 독서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내가 그를 죽였다>>에서는 가가 형사의 활약이나 캐릭터성이 크게 돋보이지는 않는다. 앞서도 지나가듯 언급했지만, 소설이 초반부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성과 피해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의 사건 경과를 서술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가가 형사는 분량 상으로도 소설의 중반 즈음에야 등장하게 된다.
그 뒤로도 준코의 범행이라 잠정적으로 결론이 얼추 내려지려는 상황에서 용의자들을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 명의 용의자들에게 긴장감을 주긴 하지만, 소설의 시점 구조 상 가가 형사의 수사 과정을 독자가 직접 보면서 따라가지는 못한다.
게다가 준코가 범인이라는 데 동의하지 못하고 세 용의자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것은 미와코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 있어서도 가가 형사가 두드러지지 않으며, 독자는 오히려 미와코의 의심이 더 크게 와닿을 수도 있다. 초점 인물 세 명이 가가 형사보다는 미와코와 심리적 거리감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가가 형사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서술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이런 느낌에 더욱 영향을 주기도 한다.)
정리하자면, 두 편을 연달아 읽어본 사람으로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는 가가 형사 시리즈로서 가가 형사라는 탐정 캐릭터의 능력과 매력이 더 잘 살아난 시리즈라고 생각하고, <<내가 그를 죽였다>>의 경우 추리 수수께끼의 복잡성과 트릭, 서술 시점 세 개를 끊임없이 교차함으로써 발생하는 교묘한 정보 생략(이러한 시점 교차는 가가 형사를 비롯한 모든 주요 인물들이 모여서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는 지점에 들어서서도 계속 이어진다) 등이 전체적으로 독자의 퍼즐 풀이를 어렵게 하는 데 일조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소설로서의 재미나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끝까지 독자를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작가의 역량이 잘 드러난 소설이라고 보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으로 저자의 시도가 흥미로웠고 소설의 내용도 충분히 재미있게 즐겼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고, 추리 소설 장르에 대한 전문성이 높은 독자일수록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소설들에 파격적이고 새로운 시도라는 표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이상하고 뒷북처럼 여겨질 만큼, 이 소설들은 출간된 지 제법 오래된 소설들이다.
일본에서 <<둘 중 누군가 그녀를 죽였다>>가 출간된 것이 1999년, <<내가 그를 죽였다>>가 출간된 것이 2002년이고, 한국에 번역 초판본이 출간된 것은 두 권 모두 2009년으로 상당히 예전 소설이다.
추리 소설에, 혹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소설들이 가진 독특한 특징들에 대해서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확률도 높다.
나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소설의 독자가 되어 경험해 보자, 시기적으로 오래전에 이루어진 새로운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의 새로움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고 누군가에게 신선한 재미를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여전히 읽어볼 만한 소설, 추천해 볼 만한 소설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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