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보건교사 안은영
저자: 정세랑
발행처: 민음사
발행일: 2015년 12월 7일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이미 유명한 <<보건교사 안은영>>은 ‘퇴마 판타지’ 장르를 표방하는 소설로, M 고등학교의 보건교사이자 남들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며 살아가는 퇴마사 안은영이 주인공인 이야기이다.
안은영이라는 톡톡 튀고 인상적인 캐릭터의 매력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고,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느슨한 연결성과, 체계적이기보다는 파편적으로 제시되는 설정에 대한 정보 때문인지 독자들이 소설 속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해 내러티브를 만들면서 읽어나가야 하는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주인공인 안은영과 관련된 설정은 상대적으로 자세히 제시되지만, 그 외의 인물들이나 설정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정보만 제시한다는 느낌이다. 특히 악역(혹은 적대 세력)으로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과 배후 세력에 대해서도 분명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들에 대한 정보는 굳이 자세히 주지 않고, 그들이 벌였고 안은영이 해결해야 하는 악행이 무엇인지에 집중한다고 할 수 있고, 작중에서 드러나는 안은영의 태도 역시 이러한 서술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이런 지점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여지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악역들이 분명하게 벌을 받거나 하는 식의 맺음이 없이, 그저 문제 상황을 은영과 인표가 해결하고 잘 살았다는 결말만 제시하기 때문에 분명한 권선징악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악역들에게 많은 설명과 서사를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지점에서 이 소설이 추구하는 방향성이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특이한 세상을 보는 안은영이 경험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세계와 인간적인 면들에 집중하려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소재를 다루는 게 '퇴마 판타지' 소설의 본분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 소설에서 진짜 다루고 싶은 이야기는 일상적이고 소소해서 너무나 인간적인 '친절함'에 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사랑할 만하고 친절할 만한 세상, 그런 세상을 살아가는 안은영의 이야기로 읽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인 안은영은 아주 어릴 때부터 영안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외롭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안"(117) 다며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퇴마 일을 계속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안은영이 보여주는 친절함이란 동화 같고 마냥 아름다운 이상화된 무엇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시 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구해 주러, 잘 버텼다고 칭찬해 주러 오지 않는다."(205)는 냉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자,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117)라는 점을 알면서도 능동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안은영이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이 현실적으로 유의미해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안은영이 보여주는 친절함은 매끄러운 태도의 친절함도 아니고, 판타지적인 외양을 띄고 있어 일견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계속 있는 친절함이라는 점, 친절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가지는 어려움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아주 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안은영은 평범하지 않은 '평범한 영웅'이다. 그렇기에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인표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265)
인표는 은영의 기 충전기(?)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좋은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있는 인물인데, "아마도 인표의 할아버지로부터 기인했을 강력한 사랑과 보호의 기운은 독특하고 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은영이 빌려 쓰는 것이었고 사실은 인표도 빌려 쓰는 것이었고 근본적으로는 이 학교의 것이었다."(122)라는 서술에서 볼 수 있듯이 인표의 좋은 기운은 인표가 삶에서 받아온 사랑, 혹은 친절함의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할아버지의 사랑뿐만이 아니라 M 고등학교의 구성원들이 보이는 친절함까지 포함된다. 인표는 비록 고등학교에서 돌 법한 각종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는 해도, 다리를 저는 신체적 장애로 인해 배척되거나 혐오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M 고등학교에서 이러한 친절함이 사라지는 현상은 (악한 세력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한) 이상 상태다. 즉 인표의 좋은 기운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세상의 친절함과 인간적인 사랑의 축적과 다르지 않고, 이런 친절함이 다양한 형태로 은영에게 다시 흘러간다.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잡고 기운을 빌려주는 행위와, 져도 괜찮다는 거짓말 같은 지지와, 스며들듯 찾아온 두 사람 간의 사랑의 모습으로. 결국 은영과 인표는 실패하더라도 친절하기를 선택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고, 작품은 이러한 은영과 인표가 결국 승리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실은 나는 이들의 승리가 '승리'보다는 '패배하지 않기'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히어로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즉 악이 완전히 패해서 사라지는 게 선의 승리라면 은영과 인표는 승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악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부정적인 힘을 지닌 존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문제 상황을 해결한다. M 고등학교라는 그들의 소중한 영역과 학교의 구성원들을 지켰지만, 악한 세력의 분명한 정체가 밝혀지거나 악인들이 직접적으로 징벌되는 결말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상대하는 악은 구체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이런 의미의) 악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 어쩌면 더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즉 제일 스케일이 크고 퇴마 판타지 소설의 화려함이 드러나는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보여주는 결말은, 친절함이 항상 이길 수는 없다는 등장인물의 현실적인 인식과, 소설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낙천성이 혼합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사람들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세상에 친절을 베푼다는 게 안은영의 방식이라고 요약해 볼 수 있다면, 악은 결코 완전히 없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안은영은 승리할 수 없는 영웅일 것이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맞서고, 친절함을 잃지 않고, 사랑한다는 점에서 안은영은 패배하지 않는 영웅일 수 있는 것이다.
친절함이라는 키워드에 꽂혀서 글을 썼지만, 이 소설은 학교를 배경으로 한 소설만이 줄 수 있는 특유의 유쾌한 분위기나 안은영이라는 캐릭터의 독특한 설정(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다니는 30대 여성이라는 이미지라던가) 등 톡톡 튀는 다양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안은영이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을 들고 다니게 된 계기가 소개되는 에피소드('가로등 아래 김강선')가 여운이 길게 남았던 것 같다. 아마 안은영이라는 씩씩한 캐릭터가 가진 가장 외롭고 어두운 과거와 그 속에서 서로 위안이 되어 주던 친구의 이야기라서 그럴지도. 넷플릭스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는 소설에 등장하는 "미색 젤리 같은 응집체"(14)를 아주 귀여운 그래픽으로 만들었던 이미지가 기억나는데, 드라마화하면서 소설 내용이 어떻게 각색되었을지도 궁금증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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