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나를 위한 신화력
저자: 유선경
발행처: 김영사
발행일: 2021년 8월 31일
<<나를 위한 신화력>>은 전 세계의 신화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처럼 상대적으로 유명한 신화들 뿐 아니라 인도 신화, 수메르 신화, 중국 신화에 한국 신화까지 다채롭게 다루어진다. 거기다 전혀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신화도 다루고 있다. 읽으면서 가장 새로웠던 신화를 소개해보려 하는데, 바로 펠라스고이 신화다.
펠라스고이라는 이름도 생소한데, 펠라스고이인들은 헬라스인 이전에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을 칭한다. 이 지역에 아리안인들이 들어와 스스로를 헬라스인이라고 불렀고, 이들이 우리가 지금 아는 고대 그리스인이다. 즉 펠라스고이 신화는 이들 원주민들의 신화이고, 고대 그리스 신화에 선행하는 신화이다.
펠라스고이 신화에서 태초의 신은 에우리노메라는 여신이다. 에우리노메는 바다의 신으로, 신화에 따르면 혼돈에서 춤을 추던 에우리노메는 북풍이 그녀의 손 안에서 변한 거대한 구렁이 오피온과 결합해 우주의 알을 낳았고, 오피온이 이 알을 자기 몸으로 일곱 번 휘감아 부화할 때까지 품었고, 알이 갈라지면서 태양, 달, 별, 산, 강, 대지가 생겨났다고 한다.(42) 그런데 이후 오피온이 자신이 이들을 창조했다 주장하자 에우리노메는 그의 머리를 발로 짓밟고 동굴로 추방시킨 뒤 홀로 우주의 일곱 개 행성을 창조했다고 한다.(72-73) 그리스 로마 신화의 가이아 역시 모든 생명의 원천이 되는 어머니이지만, 동시에 괴물을 낳거나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가차 없이 복수하기도 하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손에게 저주를 내리기도 하는 두려운 어머니의 모습도 함께 가진 신으로서 원초적 모성, 자연의 양가성 등을 상징한다고 해석될 수 있는데, 펠라스고이 신화의 에우리노메는 가이아보다도 더 강하고 두려운 모습, 인류의 원초적 상상력으로 바라본 자연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 책에서는 신화에 대한 저자만의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신화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상징하는 의미에 대한 해석이 있는데, 일단 저자는 아프로디테의 원형이 앞에서 언급한 에우리노메에 있다고 본다. 바다의 여신인 에우리노메와 우라노스의 성기가 떨어진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의 유사성을 연결 지어, 두 여신 모두 물과의 관련성으로부터 생명의 근원이자 탄생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프로디테의 탄생은 우라노스로 대변되는 카오스 시대의 정점이었다. (...) 아프로디테가 태어나 인간은 물론 불멸의 신들까지 애욕, 다른 말로 새로운 생명을 퍼뜨리고 싶은 욕망에 들끓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아프로디테는 카오스의 아들인 우라노스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히든카드이자 카오스의 정통 후계자”(72)라는 해석을 제시한다. 우라노스를 축출한 크로노스와 크로노스를 축출한 제우스는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지도자가 됨으로써 질서를 세우고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아프로디테가 관장하는 사랑과 성적 욕망은 이러한 노력들을 무위로 돌리고 다시 카오스로, 혼란하게 섞인 하나의 덩어리 상태로 돌아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흥미로우면서도 납득 가는 해석이었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제우스가 세운 질서 중 하나인 올림포스 12신의 한 자리를 아프로디테가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리스테바의 기호계(semiotique)를 떠올릴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덧붙여보고 싶다.
이 외에도 새롭게 느껴진 해석이 있었다면 북유럽 신화에서 발드르를 죽인 겨우살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일단 신화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발드르는 오딘과 프리가의 아들로 많은 이들이 사랑한 신이었는데, 그가 꿈을 통해 죽음의 징조를 보고 두려워하자 어머니인 프리가가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그를 해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낸다. 그러자 정말 신들이 발드르에게 어떤 물건을 던져도 발드르는 다치지 않았고, 신들은 즐거워했다. 이를 본 로키가 여신으로 변신해 프리가에게 접근해, 프리가가 너무 어리고 작아서 발드르를 해치지 못할 것 같은 겨우살이에게는 유일하게 맹세를 받아내지 않았다는 걸 알아낸다. 로키는 이 겨우살이를 떼어 뾰족하게 깎아서 발드르의 눈먼 동생인 회드에게 주고 신들의 놀이에 참여하라면서 발드르를 향해 던지게 하고, 발드르는 겨우살이를 가슴에 맞고 죽는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로키는 아스가르드 신들과 완전히 적대 관계로 돌아서고, 자식들의 죽음과 더불어 지하에 갇혀 형벌을 받으면서 라그나로크를 기다리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저자는 발드르를 죽인 이 겨우살이가 기생하던 나무를 북유럽 신화 속 세계수 이그드라실로 상상한다. 겨우살이는 자신이 기생하고 있는 나무의 성질을 닮아가며, 겨우살이가 죽으면 겨우살이가 기생하던 나무 본체도 함께 죽는다고 한다. 그래서 고대인들의 믿음 속에서 겨우살이는 기생하는 나무의 생명을 담은 존재로 여겨졌고, 나무를 혹은 나무에 깃들인 정령을 죽이기 위해서는 겨우살이부터 떼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로키가 발드르를 살해하기 위해 겨우살이를 떼어내는 순간 숙주 나무도 죽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240) 즉 발드르 살해 사건이 라그나로크의 시발점으로 작동하게 되는 데에는 겨우살이를 꺾어 세계수를, 곧 세계 자체를 죽게 한 로키의 행위가 있다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저자는 “한편으로 세계수의 겨우살이가 발드르의 가슴팍에 박혔다는 이야기를 발드르가 세계수가 된 것의 비유로 상상해 볼 수 있다. 비록 물질로서의 생명은 소실되었지만 더욱 신성한 존재가 된 것”(241)이라고 말하는데, 라그나로크 이후 발드르가 죽음에서 돌아와 새로운 세상을 다스린다는 걸 생각하면 타당한 해석이다. 발드르를 죽인 겨우살이 이야기는 작고 사소한 것을 놓치는 약간의 안일함이 큰 비극으로 이어지는, 신화를 비롯한 설화들에서 흔히 보이는 화소라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저자의 이런 해석이 새롭게 다가왔던 것 같다.
새로움에 집중해서 이만큼 글을 썼지만, 사실 이 책은 새롭고 다양한 신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데 목적을 둔 책은 아니다. 그러니 각 지역 신화의 전체적인 내용이나 체계를 파악하기에 적절한 책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서는 신화 외에도 장자,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 단테, 카뮈를 비롯한 작가들이 언급되기도 하고, 카오스 이론, 동서양의 미술 작품들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신화를 중심으로 한 저자의 장대하고 촘촘한 마인드맵을 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또 이 책이 정말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여러 신화들을 통해 저자가 얻은 삶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다. 진부한 비유를 들어보자면, 이 책은 세계의 신화들을 씨실과 날실 삼아 저자가 직접 엮어낸 인문학적 탐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세상은 언제나 혼돈의 카오스’의 주요 내용은, 세상은 질서와 조화를 갖춘 것처럼 보여도 그 근원은 카오스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불확실하고, “본질적으로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를 예측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지혜”(89)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2장 ‘어째서 매일 세우는 탑이 매번 무너지는가’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대한 탐구가 중심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을 창조할 적에 사악한 티탄을 불태운 재나 반역자의 피와 살이 재료가 되었다. 동시에 선한 자그레우스의 뼈와 살이, 지혜의 신이 불어넣은 영혼도 함께 들어 있다. / 이처럼 내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올림포스뿐 아니라 타르타로스도 있다. 선과 악의 투쟁일 때도 있으나 덜 사악한 욕망과 더 사악한 욕망의 투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 무엇이 될지 선택하는 것”(126)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3장 ‘내가 비록 가진 눈이 한 개뿐이지만’에서는 지혜롭게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너무 모르고 모르는 자들의 특성이 대체로 그렇듯 모르는 것을 모르는 줄 모른다. (...) 진정한 불로장생은 그저 생을 길게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노화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리라.”(312-313)와 같은 조언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화를 읽는 방식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신화와 관련된 책들을 꽤 즐기면서 읽어왔던 것 같은데, 막상 흥미롭다, 재미있다는 감상 이상의 유의미한 사유로까지 이어가지 못했었다. 조금 더 깊이,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시도가 필요한 순간인 것 같다.
인문학이란 결국 인간, 더 세밀하게는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고 내가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다양한 설화, 문학, 철학 이론 등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설명하고 있지만, 중요하고도 어려운 건 그 정수를 스스로 이해하고 체화해서 변화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특별히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더라도 인생을 오래 살아오며 각자의 깨달음을 얻은 ‘어른’들이 본다면, 맞는 말이긴 한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을 법도 한 게 인문학적 사유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아직 책으로만 인생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계속 이런 얘기들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읽는 순간 느끼는 공감과 울림을 삶에서는 금방 잊어버리곤 하더라도,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되새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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