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처음 시작하는 북유럽 신화
저자: 요시다 아쓰히코
옮긴이: 서수지
발행처: 책비
발행일: 2019년 4월 5일
책의 제목은 분명 ‘처음 시작하는’인데, 유감스럽게도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북유럽 신화 관련 도서가 되었다. <<북유럽 신화>>가 소설 같은 느낌이 강했다면 이 책은 요약 정리본의 느낌이 더 강했다. 대신 <<북유럽 신화>>에서는 보지 못한 에피소드들이 있었고, 에피소드들을 배치하는 순서나 방식도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으며, 북유럽 신화와의 연장선에 있는 게르만 서사시 두 편(볼숭 일족의 사가, 니벨룽겐의 노래)의 장대한 이야기를 요약해 준 부분도 있어서 새로운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일단, 북유럽 신화에 대해 읽게 된 계기가 바로 <<호빗>>이었기 때문에, <<호빗>>이 북유럽 신화의 어떤 면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찾아보려 했었다. 일단 가운데땅이라는 작품의 배경이 미드가르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 또 간달프라는 인물은 지혜로운 자이자 미래를 예비하는 자이며 마법사라는 점에서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인 오딘에게서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엘프들이나 난쟁이와 같은 종족들 역시 북유럽 신화에서 각각 알프헤임과 스바르트알파헤임에 사는 존재들로 등장하고 있으며, 엘프들은 아름답고 난쟁이들은 손재주가 좋다는 설정도 신화에 바탕을 둔다. 또 <볼숭 일족의 사가>에서도 <<호빗>>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을 발견했다. 파프니르, 오트르, 레긴 삼 형제 이야기에서 사악하고 재물 욕심이 많은 용 파프니르와, 형제들에게 재물을 나눠주지 않은 파프니르를 죽이려는 난쟁이 레긴은 <<호빗>>의 스마우그와 소린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재물들은 삼 형제의 아버지에게 로키가 가져다준 것인데 사실 안드바리라는 난쟁이에게서 뺏은 것이었기 때문에 안드바리가 마지막에 반지에 저주를 걸었다는 얘기는 <<호빗>>에서부터 등장해 긴 서사의 중심이 되는 절대반지를 떠올리게 한다. <볼숭 일족의 사가>에서는 시구르드가 레긴의 부탁으로 용 파프니르를 죽이고 재물을 얻는데, 안드바리의 반지를 포함한 이 재물들에는 저주가 있어 이후 이로 인해 재물을 탐낸 여러 사람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것 역시 스마우그의 재물에 스며있는 저주가 소린의 욕심을 건드려 큰 분란의 씨앗을 만들었던 <<호빗>>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신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전에 <<북유럽 신화>>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로키가 발드르를 죽게 만든 뒤 신들에게 붙잡혀 벌을 받는 장면의 잔혹함에 놀랐다. 이 책은 <<북유럽 신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묘사나 서술이 소설 같은 느낌이 덜하고 건조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는데도 이 부분은 잔혹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신화들은 다 나름대로 잔인성을 가지고 있고 신화 속 신체훼손 화소가 특별히 생소할 것도 없지만, 로키의 자식들에게 주술을 걸어 서로 죽이게 하고 죽은 자식의 내장을 꺼내 로키를 구속한다는 내용은 특히 비정하다고 다가왔던 것 같다. 물론 이건 ‘로키가 잘못한 건 알겠지만 아들들이 무슨 죄냐’는, 지극히 현대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탓일 것이다.
로키의 형벌 이야기를 포함해서,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건 게르만 민족의 문화에서 복수가 가지는 의미였다. 신화에서도, 서사시에서도 이야기가 발생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인물들이 복수라는 동기를 가지고 취하는 다양한 행동들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특히 책에서 소개해 준 두 서사시의 경우 인물들의 복수가 전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동력원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독일어권의 중세문학작품에 나타나는 게르만적인 특색>이라는 논문에서 관련된 내용을 조금 찾아볼 수 있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게르만 민족에게 복수란 보복의 의미보다 훼손된 명예를 회복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게르만족에게 있어, 전사들의 신인 오딘에게 내놓는 전사로서의 용맹과 명예, 종족과 수장을 섬기는 수하로서의 충성심과 명예는 복수와 더불어 자리한다.(495) 전사, 무사라는 측면에 있어서 게르만족은 오딘을 믿으며 오딘과 함께하는 무사로서 용맹Tapferkeit과 명예Ehre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494) “여기에는 용서와 화해가 용납되지 않”(516)았다. 또 혈연 공동체 지페Sippe의 구성원이자 주군을 모시는 수하로서 게르만족은 충성심을 중시하며, 이 충성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군 혹은 남편 혹은 종족의 훼손된 명예(말을 통한 모욕, 억울한 죽음 등)를 회복하기 위한 복수를 “냉엄한 의무Kalte Pflicht”(500)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게르만족의 이러한 명예 회복을 전제하는 복수와 전사의 용맹은, 이후의 기독교 중심의 기사도 시대, 기사도 문학에서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기독교 신의 ‘사랑’에 밀려난 반면 충성심과 명예는 고유성을 지키면서 기독교적 요소와 함께하며 변이 된다.(496, 507) 1
해당 논문에서는 이 책에서 소개한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도 다루고 있다. <<니벨룽겐의 노래>>는 궁전기사도문학 시대에 어느 무명작가가 쓴 영웅 서사시인데, 이 시기(12, 13세기)는 십자군 원정으로 기사 계급이 중심인 시대였으며, 원정으로 인해 접한 동방의 영향으로 이 세상을 긍정하는 인식과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모색한 시기이다. 그러나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기독교에 영향받은 내용을 거의 찾을 수 없다. 인물들이 미사에 가거나 하는 등 형식적인 기독교 예식들이 등장할 뿐, 인물들의 행동 양상은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니벨룽겐의 노래>>에는 “기독교 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선과 악이 존재하고 있지 않”고 오직 “게르만 종족의 고유성인 ‘용맹’, ‘충성심’, ‘명예’와 ‘복수’라는 명목하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하는 것이 지배하고 있다.”(503)
이런 내용들을 바탕으로, 북유럽 신화에 나타나는 신체훼손 화소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신화들이 다들 잔인하지만, 북유럽 신화에서 나타나는 신체훼손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는 결이 좀 다른 느낌을 매번 받았다. 당장 생각나는 예시들만 몇 가지 떠올려 봐도, 토르 이마에 돌조각이 박혀서 나오지 않는다던가, 로키의 입가에 난쟁이들이 입을 꿰매었던 흉터가 남았다던가, 로키를 구속할 때 그 아들의 창자를 뽑아내거나, 오딘이 지혜의 샘을 마시려고 눈 한쪽을 스스로 뽑아 샘에 띄운다던가, 지혜로운 미미르가 죽자 그의 지혜를 아까워한 오딘이 그 머리를 박제해서 계속 조언을 얻는다던가, 펜리르를 구속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는 대가로 펜리르의 입에 들어가 있던 신의 오른팔을 잘라먹게 한다거나 하는 등, 신들이 신체 일부를 잃거나 복구되지 않는 상처를 입는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 것 같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사람을 산 채로 씹어 먹는 키클롭스나 자신의 침대보다 작은 사람은 몸을 잡아당겨 죽이고 큰 사람은 튀어나오는 부분을 잘라서 죽이는 악당이 나오기도 하고, 자기 동생의 시신을 토막 내 바다에 버려서 도망칠 시간을 벌었던 메데이아의 이야기도 있으며, 트로이 전쟁 시기에 들어선 이후의 이야기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서로 죽고 죽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지만, 왜인지 신체훼손이 많다는 이미지는 없다. 이유를 생각해 보자면, 그리스 신화의 경우 신들의 신체가 훼손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신이 상처를 입으면 큰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반해, 북유럽 신화의 신들의 몸은 훼손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인 오딘부터도 한쪽 눈이 없다. 위에서 이해한 문화적 특성을 바탕으로 예상해 본다면, 게르만 민족들을 전사로서의 명예를 중시하는 만큼 전투에서 죽거나 다쳐서 몸이 상하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위대한 신들도 전사로서 훼손된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상상했던 것 같다. 반면 그리스 신화의 경우에는 완벽한 비율과 온전하고 아름다운 걸 중시하고, 그것이 완벽하고 위대한 신들의 형상이라고 생각해서 신을 훼손된 형상으로 잘 상상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리스 신화의 헤파이스토스가 예외가 되겠다.)
또 새로웠던 내용은 북유럽 신화에서 드러나는 숫자 9에 대한 게르만족의 인식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계는 아홉을 주기로 새로워진다’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독일어에서 ‘아홉’은 ‘노인(neun)’이라고 하고, ‘새로운’이라는 의미의 형용사는 ‘노이(neu)’라고 한다. 또 프랑스에서 ‘아홉’과 ‘새로운’은 모두 ‘누프(neuf)’라고 한다. 인도유럽어족 중 하나인 산스크리트어에서도 ‘아홉’과 ‘새로운’은 모두 ‘나바(nava)’로 동일하다. 즉, 아흐레 밤마다 여덟 명의 자식을 떨구어내 총 아홉 개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반지 드라우프니르를 소유하는 것은, 세계 창조를 관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64)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관련된 다른 글이 있을까 간단히 찾아봤는데, <북유럽 신화와 3수 분화의 세계관> 이라는 흥미로운 논문이 있어서 읽어보았다. ‘3수 분화의 세계관’은 논문 저자가 고안한 명칭으로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라는 관념을 바탕으로 ‘하나에서 셋으로 지속적으로 분화되는 일련의 사유체계’”(89)를 의미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3수 분화의 세계관’은 몽골을 비롯한 고대 북방 샤머니즘에서 드러나는 고유한 사유체계인데, 이것이 동북아시아를 넘어 중앙아시아와 북유럽 지역의 샤머니즘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다. 2
논문에 따르면 ‘3수 분화의 세계관’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는 ‘하나이면서 셋이고 셋이면서 하나’라는 3.1 관념이며, 이는 신으로 여겨진 태양이 3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환일 현상에서 기원했다. 이를 바탕으로 3.1신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에서 셋으로 지속적으로 분화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수들인 3(변화의 계기수), 9(변화의 완성수), 81(우주적 완전수)을 상징성을 지닌 성수로 여긴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 우주를 3층 9층으로 나누는 삼계구천설과 그 여러 층의 세계들을 연결하는 우주수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징들은 주로 북방 샤머니즘에서 드러나지만 북유럽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북유럽 신화의 우주관을 들 수 있다. 하늘세계-인간세계-지하세계라는 세 평면이 있고 각 세계마다 3개의 세상으로 분화되어 총 9개의 세상이 있다는 삼계구층설 우주관에 대응되는, 북유럽신화의 상층(무슬펠헤임, 아스가르드, 알프헤임)-중층(바나헤임, 미드가르드, 요툰헤임)-하층(스바르트알파헤임, 니플헤임, 헬) 구조와, 9개의 세상을 연결하는 우주수에 대응되는 9개 세상의 가운데에 있으면서 이들을 연결하는 물푸레나무 이그드라실이 이를 보여준다.
처음 흥미를 가졌던 ‘북유럽 신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숫자’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보면, 먼저 숫자 3에 있어서는 세 명의 신이 하나의 기능을 하는 3.1신 관념에 따르는 신들이 있다. 운명의 여신, 공예의 신, 지혜의 신, 전쟁과 싸움의 여신 등이 이런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3은 변화의 계기수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데, 대표적으로 3명으로 이루어진 공예의 신 콜루 콸레위히는 각각 단 3번의 해머질, 망치질, 도끼질로 다양한 물건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3.1신 관념은 고대 이집트, 고대 오리엔트, 고대 인도 지역에서 모두 발견되며, 시기적으로도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동북아지역에서도 발견되는데, 신석기시대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도소삼인상은 3명의 여인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형상을 한 풍요를 기원하는 여신상으로 3.1신의 형상을 보인다. 또 만주족 창세신화 <천궁대전>은 하늘의 여신 아부카허허의 몸이 찢어져 땅의 여신과 별자리 여신이 생겨났고 이 세 여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명함으로써 역시 3.1신의 형상을 보인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북유럽 신화에서 숫자 9는 반복적으로 등장해 특히 주목되는 숫자이다. 책에서 다룬 오딘의 보물 드라우프니르가 9일 밤마다 같은 모양의 팔찌 8개를 낳아 9개가 되는 것 외에도, 북유럽 신화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아홉 세상, 오딘이 거인으로부터 배운 아홉 개의 마법의 노래, 헤임달의 아홉 어머니, 오딘의 아들인 헤르모드가 발드르를 저승에서 데려오고자 여행한 9일의 기간, 오딘이 지혜를 얻기 위해(룬 문자를 깨치기 위해) 스스로 옆구리에 창을 찌르고 이그드라실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9일의 기간, 오딘의 신전인 우프살라에서 거행된 종교의식은 매 9년마다 9일 동안 이루어지며 9명의 사람과 모든 종류의 짐승을 각각 9마리씩 제물로 바치는 등의 내용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저자는 ‘3수 분화의 세계관’에서 9는 변화의 계기수 3이 3번 반복된 변화의 완성수이자, 최고, 최강 등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북유럽 신화 외에 북방 샤머니즘의 영향권 안에 있는 만주족의 창세신화 <천궁대전>에서도 이와 유사한 숫자 9의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천궁대전>은 전체 이야기가 9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오친 여신과 악마신 예루리는 9개의 머리를 지녔고, 동쪽 하늘에 있다는 9개 가지가 달린 신수, 9층 하늘과 하늘다리를 지나는 9갈래의 길 등이 등장한다.
또 숫자 81 역시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북방 유목민들은 “각종 기물 9가지를 9벌로 선물하는” 구구예법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딘의 신전에서 행해진 의식에서 ‘모든 종류의 짐승을 아홉 마리씩’ 바쳤다는 표현(...)은 북방 유목민들에게 보편적으로 보이는 구구법이나 구구예법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오딘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9명의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고 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타우로스에게 총각과 처녀 각각 7명씩 제물로 바치는 것과 비교했을 때 숫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즉 고대 북유럽의 성수가 9였던 반면 고대 그리스-로마/수메르-메소포타미아 지역은 7을 성수로 여겼던 것인데, 이는 단순한 숫자 차이가 아니라 성수의 차이인 만큼 곧 사유체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두 지역의 사유 체계의 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암시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살펴본 북방 샤머니즘 신화와 북유럽 신화 간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저자가 기존에 몽골을 비롯한 북방 유목민족의 신화를 해석하던 ‘3수 분화의 세계관’ 개념을 북유럽 신화에 적용함으로써 북유럽 신화를 재해석해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화에 등장하는 주술적 혹은 상징적으로 유의미하며 반복되는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한다는 관점 자체도 개인적으로는 새로워서 흥미로웠고, 비교신화학적으로 관점으로 접근해서 아시아권 신화와 북유럽 신화를 연관 지어보는 논문의 내용도 흥미로웠던 것 같다.
사실 책에서는 “인도유럽어족으로 분류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계는 아홉을 주기로 새로워진다’는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있다.”면서 여러 언어의 단어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어원 측면에서 접근했었던 만큼, 이 논문은 원래 조사해 보려던 주제와는 포인트가 살짝 빗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기회가 된다면 인도유럽어족의 신화적 사고방식이나 상상력에 대한 연구도 찾아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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