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마술 피리
저자: 찬호께이 CHAN HO KEI
옮긴이: 문현선
발행처: (주)시공사
발행일: 2021년 9월 14일
동화 다시 쓰기를 통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매번 흥미롭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다시 씀으로써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고, 기존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하는 시선들을 접하는 것은 신선한 자극이 된다. 이건 글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해당되는 일 아닐까 싶다.
대표적인 동화 다시 쓰기 작품으로는 몇 달 전 개봉했던 영화 <위키드>가 있다. 해당 영화는 동명의 유명 뮤지컬을 영화화한 것이고, 뮤지컬 <위키드> 역시 동명의 원작 소설 시리즈의 일부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듯 <위키드>는 <오즈의 마법사>를 원작으로 삼아, 도로시가 아닌 사악한 서쪽마녀를 주인공으로 다시 쓴 이야기이다. 원작에서 그저 악한 존재라고 불리는 서쪽마녀가 어쩌다가 오즈의 악한 존재가 되었을지에 대한 서사를 부여하면서 선악의 불분명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다른 예시를 들자면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 <<클라라 죽이기>>, <<도로시 죽이기>>, <<팅커벨 죽이기>> 시리즈가 있는데, 이 역시 유명 동화들을 차용해 잔혹동화의 느낌을 더한 추리 스릴러 장르로 다시 쓴 소설들이다. 동화와 추리라는 두 장르의 결합은, 동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기대하고 예상하는 순수함에 추리 소설의 기본이 되는 범죄가 섞여 들어가면서 흥미로운 조합이 된다.
이번에 소개할 <<마술피리>> 역시 동화와 추리가 만난 경우다. <<마술피리>>는 홍콩 작가 찬호께이의 동화 각색 소설집으로, 타이완추리작가협회 공모전 결선에 오르면서 그의 작가 인생을 시작하게 한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을 비롯한 세 편의 추리 소설을 엮었다.
찬호께이 작가는 이번에 <<마술피리>>를 우연히 접하게 되면서 처음 알게 된 작가인데,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온 작품들이 이미 꽤 많이 있었다. 이번에 <<마술피리>>를 읽어보니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꽤나 기대가 되어,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탐정과 조수 역할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호프먼 선생과 그의 하인 한스다. 호프먼 선생은 문화학자로서 유럽 전역의 다양한 민간 전설들에 관심이 많아, 흥미로운 이야기를 조사하기 위해 하인 한스와 함께 유럽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
호프먼 선생은 "일단 우리가 아는 사실에서 증거를 찾고, 결론을 내릴 수 없을 때 모르는 걸 탓하자"(32)는 좌우명을 가진 이성적인 학자로, 사람들이 마술과 마녀와 저주를 속절없이 믿고 있는 중세 유럽에서 일견 초현실적인 현상을 현실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는 관찰력과 논리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 호프먼 선생의 하인이자 소설의 서술자이기도 한 한스는 호프먼 선생과 같은 이성과 논리를 갖추지는 못했고 초현실적인 현상을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압도적인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흥미롭다고 느껴지는 소문이 있으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여정을 질질 끄는 호프먼 선생의 행동에 불평하면서도 호프먼 선생을 성실히 따라다니며 맡은 바를 다하는 충실한 인물이다.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에서는, 두 사람이 머물기로 한 마을에서 아름다운 홀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어리숙한 소년 잭이 절벽 위에 살던 친절한 거인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판 뒤에 숨겨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다.
<푸른 수염의 밀실>에서는 두 사람이 말을 타고 길을 가는 중에 우연히 도망쳐 나온 푸른 수염의 아내(남작부인)를 만나 도와주다가 푸른 수염의 지하실과 시체 이야기를 듣고, 남작부인과 함께 푸른 수염의 성으로 돌아가 푸른 수염의 정체와 그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밝혀낸다.
표제의 출처이자 책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하멜른의 마술 피리 아동 유괴사건>에서는 아이들을 유괴해서 잡아먹는다는 마녀의 전설 이야기와 신비로운 피리 연주로 쥐들을 잡은 쥐잡이꾼과 그에게 사악한 마법을 썼다며 보수로 약속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은 마을 부호의 갈등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을 시작으로, 호프먼 선생과 안데르센이 여관에서 머무는 동안 마을 아이들이 한 명씩 사라지는 사건이 생기면서 두 사람은 아이들을 되찾기 위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된다.
세 이야기 모두 정통 추리소설의 형식을 따라 탐정이 사건을 접하고, 사건을 조사하며 단서를 독자에게도 공정히 제공한 뒤, 후반부에 자신의 추리를 설명하는 탐정의 입을 빌려 사건 풀이의 정답을 알려주는 식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단서의 제시와 회수가 상당히 치밀하다는 인상을 주며, 특히 후반부에서 알려주는 사건의 진실을 듣다 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단서가 되거나 전혀 다른 관계성 혹은 반전이 있어서 꼭 한 번 이상은 그 기발함에 놀라게 된다.
각 단편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은 영국의 민간 설화인 <잭과 콩나무>를, <푸른 수염의 밀실>은 프랑스의 설화이자 샤를 페로가 편찬한 동화집에 수록된 <푸른 수염>을, <하멜른의 마술 피리 아동 유괴사건>은 독일의 도시 하멜른에서 전해지는 전설을 바탕으로 그림 형제가 쓴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따라서 소설의 배경도 각각 영국, 프랑스, 독일의 도시 혹은 마을이며, 동시에 시대적인 배경에 맞춰 종교 재판이나 신분 제도 등의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사건에 어우러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원전이 된 동화의 흔적과 동화적인 느낌을 적당히 살리면서도, 동화의 이야기를 중세 유럽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에 옮겨 두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추리 소설로서 성립되도록 하기 위해 여러 요소들을 좀 더 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바꿨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역량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자의 후기에서 각 단편을 집필하면서 저자가 자료조사를 어떻게 했으며 어떤 자료에 영향과 영감을 받아 작품을 썼는지 읽어볼 수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배경이 되는 하멜른에 직접 답사를 다녀오기까지 할 정도로 중세 유럽에 대한 배경 조사에 진심이었다는 게 묻어나는 후기도 소설만큼이나 무척 흥미롭다.
또한 호프먼 선생과 하인 한스라는 두 주인공 캐릭터 역시 매력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전형적인 셜록-왓슨 구도의 인물들로, 추리와 지식과 귀족 신분과 능글맞음을 담당하는 호프먼 선생과, 단순 정직함과 무력과 기타 잡무를 담당하는 하인 한스의 대조는 두 인물의 유쾌한 투닥거림을 바탕으로 강조된다.
서술 시점이 하인인 한스의 1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어, 호프만 선생의 추리와 계획을 직접 듣기 전까지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고 효과적으로 숨길 수 있게 된다는 점 역시 유사하다.
라일 호프먼 선생의 이름은 <호두까기 인형>의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에게서, 하인 한스의 풀 네임은 안데르센 그린 한스로 너무나 유명한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에게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법학을 전공했고 문화학자이며 민간 전설에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건 호프먼 선생인데, 막상 민간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을 맞닥뜨리면 호프먼 선생은 추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논리적으로 밝혀내고 민간 전설로서의 흥미는 잃어버리는 듯 보이고, 각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한스가 그동안 겪은 사건을 바탕으로 어떤 내용의 동화를 쓰면 좋을지 이야기하고 제목을 붙이는 부분에서는 사건이 마무리된 뒤 사건을 동화로 다시 쓰는 건 왠지 한스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실 세 이야기에는, 각 제목에 곧바로 드러나는 원전 동화 외에 차용된 동화가 한 가지씩 더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한스가 그걸 알려주는데 한스의 입으로 듣기 전에 유추해 보는 것도 재미있다. (저자의 후기에서 <잭과 콩나무 살인사건>의 모티브가 된 다른 동화가 언급되고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른 두 이야기에 비해 숨겨진 원전 동화의 영향이 가장 적고 잘 드러나지 않아서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접근도 흥미롭다.)
탐정 캐릭터의 매력은 높은 능력치에 더해 인간적인 면모가 함께 할 때 최상이 된다. 호프먼 선생이라는 캐릭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호프먼 선생은 평민들과 함께할 때 인간적인 면모가 부쩍 강조되는 인물이다. 그 자신은 귀족이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평민들에게 상당히 친화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이 소설 내의 세계 안에서 꽤나 예외적인 모습으로 여겨진다.
하인 한스를 놀리거나 그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고 평소에는 평민들과 수더분하게 잘 어울리면서 그들과 인간적으로 교류한다. 유하고 능글맞은 모습을 보이고 필요에 따라서는 거짓말도 자연스럽게 한다. 이러한 유한 모습 이면에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모든 일에 접근하는 태도가 바탕에 깔려 있는데 이러한 태도는, 작품 속 시대 배경이 중세 유럽인만큼 마녀와 저주, 마법등을 믿는 주변 인물들과 대비되어 주인공을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반면 재산과 권력을 휘두르며 평민들을 착취하는 부패한 부호, 귀족, 권력자들에게는 냉소적이며 그들의 죄를 밝혀내는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엄격하고, 그들에게 당한 평민들을 위해 강하게 되갚아주는 모습도 보인다.
그래서인지 악인들의 서사가 어찌 보면 조금은 평면적이고 반복적이기도 하다. 그들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조금씩 다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욕망의 기저에는 항상 재물 혹은 지위와 권력에 대한 욕심이 얽혀 있고(이미 가진 것을 지키려 하는 것이든 새롭게 얻으려 하는 것이든 간에) 동시에 그러한 자신들의 욕망을 위해 피지배 계층의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형태로 발현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과 유사한, 기득권 계층에 속해 있으나 그들의 행태에 반발하는 이들에 의해 방해를 받음과 동시에 호프먼 선생의 개입으로 그들의 범죄는 결국 실패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마술피리>>는 결론적으로 가볍게 즐기며 읽기 좋은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늘어지지 않고 흡입력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무겁지 않게 진행되며, 동화 각색의 효과인 익숙한 새로움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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